“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재미와 감동 주고 싶어”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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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베리 상 수상한 재미동포 동화 작가 린다 수 박



공석에서 만난 린다 수 박은 성공한 커리어 우먼 같았다. 영민해 보이는 눈빛에, 말투는 똑부러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이런 여자가 어떻게 말랑말랑한 옛 이야기를 끝도 없이 풀어놓는 동화작가라는 것인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사석에서 만난 린다 수는 장난꾸러기 소녀 같았다. 쾌활하고 웃음이 넘쳤다. 한국산 돌멍게를 산 채로 입에 넣는 그녀의 얼굴은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먹을 것 앞에서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죠.”그녀는 동화작가 겸 음식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린다 수에 따르면, 그녀를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은 부모였다. 경기고·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이민을 결심한 그녀의 부모는 자녀에게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상기시킬지 말지, 내면의 갈등을 겪었던 듯하다. 그들은 집에서 자녀가 한국말을 전혀 쓰지 못하도록 했다.


아홉살 때 쓴 시 아동 문학지에 실려


대신 아버지는 그녀에게 부계쪽 성(姓) 외에 어머니의 미국식 이름(수지) 중 머리 글자를 딴 미들네임 ‘수’를 지어 주었다. 그녀를 ‘린다 수’가 아닌 ‘린다’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아버지는 마구 화를 냈다.
자녀 교육에 열성이었던 부모 덕분에 일찌감치 문자를 터득한 린다 수는 아버지를 따라 도서관에 다니며 글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 그녀가 아홉 살 때 쓴 시가 아동 문학지에 실렸을 때 아버지는 원고료로 받은 1달러를 액자 속에 끼워 소중하게 간직하며 딸의 문학적 재능을 독려했다.


그렇지만 린다 수가 정작 동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40대가 가까워져서였다. 스탠퍼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정유회사 홍보 담당자·카피라이터·교사 등으로 활약하던 그녀는 어느 날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다가 ‘엄마의 나라에 대해 얘기해 줄 것이 너무 없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한국에 관한 영문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시선을 단숨에 붙드는 문구가 있었다. ‘11∼12세기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심지어 중국산 도자기를 능가하는 청자를 만들어냈다.’ 고려 시대의 고아 소년 ‘목이’(목이버섯에서 유래한 이름이다)가 역경을 딛고 도공으로 성장하는 내용의 동화 <사금파리 한 조각>은 이 문구로부터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서울문화사 펴냄)된 이 동화는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일단 소재 면에서 이 책은 분명 한국적이다. 린다 수는 밀삐(지게를 어깨에 걸머지는 끈)처럼 한국 작가도 구사하기 힘든 토종말을 끌어들이며, 진흙을 채취하고 상감을 하는 도자기 제작 과정을 생생하게 재연한다. 열두살 때 한국에 딱 한 번 와 보았을 뿐이라는 작가는 빼어난 상상력으로 작품 배경이 된 12세기 줄포(고려시대 도요지로 유명한 전북 부안 인근의 소읍)를 손에 잡힐 듯 그려낸다.


그렇지만 구성 면에서 <사금파리 한 조각>은 낯설다. 권선징악 따위 공동체의 규범을 강조해 온 한국의 전래 동화들과 달리 이 동화는 한 개인이 역경을 이기며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테면 구미식의 전형적인 성장 동화인 셈이다.
목이가 아버지뻘인 두루미아저씨와 ‘토론’을 벌이며 우정을 다져 간다는 설정도 한국 사람 정서에는 어색하기만 하다.


“한국 알리는 것이 궁극적 관심사는 아니다”


이는 역으로 이 동화가 세계화 시대, 만국의 어린이에게 공감을 얻는 요소이기도 하다. 구미 동화의 문법에 익숙한 아이들은 목이가 사부인 민도공의 양자가 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결말에 감동하고, “노동은 사람을 품위 있게 만들지만, 도둑질은 사람에게서 품위를 빼앗는 거야” “학자는 이 세상의 고귀한 단어들을 읽어내지. 그러나 너와 나는 세상 그 자체를 읽는 법을 익혀야 한다”처럼 지혜로운 두루미아저씨의 잠언에서 교훈을 얻는다.


“한국을 알리는 것은 내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고 싶다”라고 말하는 린다 수는, 그렇지만 10만 명이 넘는 미국 내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그녀로 인해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팬 레터를 보내 왔을 때 무척 기뻤다고 말했다. 최근 그녀가 미국에서 발표한 <내 이름이 키오코였을 때>는 2차 세계대전 때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동화로, 부모가 체험한 과거사를 좀더 직접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였다. 국내 독자들은 올해 안에 <널뛰는 소녀> <연싸움>(가칭) 등 그녀의 다른 동화를 번역본으로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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