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참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처럼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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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 거리와 무대에서 반미 대열 동참
장면 하나. 지난 11월29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가수 신해철과 싸이가 미군 장갑차 사건의 무죄 평결을 항의하며 신곡 <킬러>를 함께 불렀다. 이 날 싸이는 모형 장갑차를 부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장면 둘. 12월1일 광화문 교보빌딩 앞.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양과 미선양을 추모하는 네티즌 촛불 시위에 가수 이정현이 동참했다. 이씨는 자기 차량에까지 ‘청소년들이여 일어나라. SOFA 전면 재개정’이라는 표어를 붙였다.





장면 셋. 12월6일 광화문 한국통신빌딩 앞. 개그우먼 김미화씨 등 연예인 20여 명이 ‘부시 미국 대통령 사과, SOFA 개정’을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문화예술인 1백29명은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 평결에 대한 선언문’에 서명해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자존심 잃지 말고 할 말은 하자”


일반 국민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많은 연예인이 반미 시위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혹은 집회장에서 이들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외치며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쇼트트랙 판정 시비와 전투기 강매,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비롯된 일반 국민의 반미 감정이 뿌리가 깊듯 연예인들의 반미 감정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난 12월6일, 연예인들의 반미 시위가 있었던 미국대사관 주변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번잡했다. 시위에서 연설자로 나선 배우 최민식씨는 “배우의 한 사람이 아니라 화를 참지 못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뉴스에서 미국 국방장관이 주둔군지위협정을 개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말 화가 났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성과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날 시위에서는 항의의 표시로 영화감독 박찬욱씨와 류승완씨가 삭발을 했다. 삭발에 앞서 류승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보다 강한 나라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자존심 있는 나라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깎을 머리라도 있지만 우리 정부는 더 이상 깎일 자존심도 없다. 자존심을 잃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침이슬> <아리랑>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 촛불 시위에서 자주 등장하는 곡들이 불리는 동안 두 감독의 머리는 민둥산이 되었다.


이 날 시위가 특히 의미가 있었던 것은 철저히 연예인들에 의한 시위였다는 점이다. 이번처럼 연예인들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시위를 처음 발의한 사람도 개그우먼 김미화씨였다. 평소 녹색연합뿐만 아니라 참여연대·유니세프·여성재단·여성민우회 등 여러 단체에서 홍보대사를 맡고 있던 그녀는 연예인 시위를 위해 시민단체의 힘을 빌렸다.






녹색연합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김씨는 얼마 전 녹색연합으로부터 겨울철 내복입기 캠페인에 참여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때 그녀는 그 관계자에게 “내복입기 캠페인도 중요하지만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평결에 항의하는 것이 먼저다”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녹색연합은 즉시 시민단체 핫라인을 가동했다.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문화개혁시민연대·영화인회의·민족음악인협회에 전화를 걸어 동참할 연예인을 모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연예인들이 이번 시위에 대거 참여할 수 있었다. 연예인 시위를 지켜 본 피해 여중생 부모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바쁜 연예인들이 시위에 동참해 주어서 고맙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반드시 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이루어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젊은 연예인들은 또래 네티즌들이 그렇듯 인터넷을 통해 이번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다. 3집 앨범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난하는 라는 곡을 발표하는 등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가수 이정현씨는 뉴스에서 무죄 평결 소식을 듣고 인터넷 검색에 나섰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이름을 검색한 그는 ‘민중의 소리’ 사이트에 들어가 촛불 시위 소식을 보고 시위에 동참했다.


미국 교포 출신 연예인들도 인터넷을 통해 이번 사건을 접하고 분노하고 있다. 인터넷 서핑 중에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과잉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발견한 모델 쥴리 씨는 이 동영상을 다른 교포 출신 연예인들이 볼 수 있도록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다음카페에 올렸다. 동영상을 보고 분노한 동료 연예인들을 이끌고 그는 광화문 촛불 시위에 동참했다.


추모 앨범·반미 공연 계획


인터넷은 연예인들이 자기 주장을 알리는 통로로도 이용되었다. 가수 신해철씨는 자신의 홈페이지(www.ghoststation.co.kr)에 여중생 압사 사건에 대한 의견을 사건 초기부터 올려왔다. 자기가 회장으로 있던 청년음악인모임 회원들과 함께 항의 시위를 계획한 그는 미국의 음악 친구들을 불러 여중생 추모 앨범을 함께 낼 계획도 세웠었다.


가수 윤도현씨(110쪽 인터뷰 기사 참조)는 무대에서 반미 시위를 진행 중이다. 전국 순회공연 중인 그는 공연마다 미국의 세계 지배에 항의하는 <하노이의 별>을 부르고 있다. 그는 새 앨범에 이번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작곡한 <니노, 워커 장갑차 살인사건>을 넣을 계획이다. 이밖에도 록그룹 트랜스픽션 등 많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반미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반미의 함성은 무대 위에서도 더욱 크게 울려 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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