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 혹은 ‘감각의 제국’
  • 안병찬 (<시사저널> 고문·경원대 교수) (abc@sisapress.com)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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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 언론학자의 인터넷 순행기/거칠 것 없이 활달한 신세대 신세계
5060세대의 눈에 비친 사이버 폐인은 어떤 모습일까? 기자는 5060세대의 대표로 기자 출신 언론학자인 안병찬 교수에게 사이트 관전평을 부탁했다.






인터넷 속을 순찰하라니, 무변 세계의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보라는 말인가. 인터넷 담당 고재열 기자가 나를 꾀기를 그곳에 가면 ‘감각의 제국’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모나미 볼펜을 쓰던 조간 신문 사회부 기자 시절, 나는 경찰을 순찰하는 ‘찰찰기자’였다. 경찰 기자는 지금도 일본어 ‘사쓰마와리’로 통한다. 사쓰마와리는 ‘가슴앓이’를 하듯 신역이 고달픈 자리이다. ‘주침야활’(낮에 자고 밤중에 설치는)하던 그 때를 생각하며 주침야활하는 ‘네티즌 폐인촌’을 누벼 가슴앓이를 체험하라는 주문이다. 나는 ‘1인 미디어’와 ‘이슈 게시판’ 등 인터넷 단지(사이트) 주소 14개를 받아들었다.


먼저 찾아 들어간 곳은 정치 협객들의 세계다. 고개를 넘으니 설국(雪國)이 펼쳐진다더니, 노트북 자판을 넘자 무림(武林)이 펼쳐진다. 이름도 깜짝 놀랄 ‘서프라이즈’로다. 고수 9명이 저마다 휘두르는 글귀가 허공을 가른다. ‘삐딱뷰 정치’ ‘박력의 정치’ ‘자영업 정치’ ‘테크노 정치’ ‘격정의 정치’…. ‘삐딱뷰 정치’에 대고 다람쥐(마우스)의 단추를 누르자 아흔아홉 개의 칼럼 제목이 나온다.


조회 수가 가장 많은(1만4천8백55회) 아흔여덟 번째 칼럼 제목은 ‘“럼스펠드, 너 말 잘했다”-주한미군 철수론의 본질과 함정’이다. 이 필자는 한국의 새로운 움직임은 일종의 ‘친미 자주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구 냉전 세력이 이를 반미로 과대 포장하고 싶어한다는 요지의 논지이다.
이 칼럼 뒤에는 끝이 안보일 만큼 긴 줄을 이은 네티즌의 반응(피드백)이 따른다. 네티즌 ‘돌마루’는 미국을 꼬리 미자 ‘미국(尾國)’으로 호칭하고, ‘4학년 아빠’는 “럼스펄드는 먼지가 나도록 맞아봐야 바른 말 할 듯…”이라고 비꼰다. 이들의 칼럼 제목은 기발하되 논리는 정연하다. 이 단지가 내건 구호는 가로되 ‘진짜칼럼주의’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김풍넷’. 마침 인터넷 신조어인 아의 특허를 출원했다는 소식을 구텐베르크 신문(일간 신문)에서 읽은 터이다. 이 단어는 황당하고 엽기적이며 아주 즐겁다는 복합어. 인터넷 만화가 김 풍은 작년 여름부터 아 러닝셔츠를 입힌 만화 인격(캐릭터) ‘폐인’을 내놓아 돌풍을 일으켰다.


이 단지의 ‘한글날 특집 만화’(접속 횟수 4만5천2백93회)는 한국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전달받은 백악관을 그리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한국어 통역사를 급히 부른다. 내용은 ‘미국 대통령에게 고하오. 이번에 미군이 방법한 여중생 사건은 참으로 아하며 스타쉬피스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이 글을 본 백악관 통역관은 투덜댄다. ‘제길…1년 동안 통신어만 공부했는데 하나도 모르겠다’고.


‘색깔 유지’ 차원에서 남성 입장료만 인상


여성 성인 단지인 ‘팍시러브’는 첫 화면부터 도발적이다. 남성 회원들의 입장료 인상에 관한 공지 사항이 떠 있다. ‘팍시러브에 새로 가입하는 남성 회원들의 평생 회비를 종전 1200원에서 12000원으로 인상합니다. 과도한 언론 노출의 부작용으로, 남성 회원 비율이 급증하는 관계로 마을(커뮤니티) 색깔 유지 차원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이다.


‘골초의 꼴림문학가 산책’은 여자들의 포르노로 알려진 야오이를 전격 해부한다고 고지하고 있다. ‘삽입시의 고통은 엷어졌지만 그래도 이 압박감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하루오는 생각한다. 알렉스의 앞머리가 완전히 파묻히고 나면 다음은 스무드했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것이 이 단지 특징이다.


‘제로보드’는 비방과 욕설, 음란성과 상업성이 뒤덮은 게시판이 자정을 거쳐 공론의 장으로 바뀐 단지라고 한다. 해충을 죽여준다는 ‘세스코’는 관리자가 게시판에 답변을 올려주는 방법으로 인기를 끈다.
‘폐인’들의 거주처인 새로운 단지들은 만화경이다. 감각적인 어휘와 표현과 삶이 생선 비늘처럼 튄다.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장의 그림>이 떠오른다. 이 신세계 전람회장을 유보(遊步)한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가슴앓이를 더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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