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학의 아버지’ 카르티에-브레송의 삶과 예술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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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으로 승화한 결정적 순간의 우연
‘세기의 눈’이 눈을 감았다. 지난 8월2일(현지 시각) 95세로 타계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망 소식은 장례식이 다 치러지고 난 8월4일 저녁에야 공식 발표되었다. 장례식은 가족과 동료 15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고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그의 기질을 익히 알고 있던 프랑스 언론도 그의 고요한 죽음에 다시 한번 숙연해졌다.

리베라시옹은 마치 조기를 게양하듯 8월5일 자를 온전히 그에게 바쳤다. 10면에 달하는 추모 기사를 실었고, 정치면·사회면 등 다른 지면에서도 기사의 해당 사진 대신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 사진 20여 컷을 채워 넣었다.

의식하든 안 하든,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라면 카르티에-브레송처럼 찍거나 찍고 싶어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20세기의 눈’ ‘사진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그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그러나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런 평판과 수식어를 싫어했다. 그는 유명세란 한 작가를 ‘썩게’ 만드는 치명타라고 말했다.

간디·사르트르·카뮈·베케트 등 수많은 인물들의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자신의 사진은 거의 없다. 자화상이라고 해봐야 서너 컷이 고작이다. 그래서 멕시코인들로부터 ‘새우 빛깔 미남’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수려했던 그의 외모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4년 사진계에서 공식 은퇴한 이후 그는 그림과 데생에만 몰두하며 30여 년을 조용히 보냈다. 타계 직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지팡이에 노구를 의지하며 루브르에서 시간을 보냈던 영원한 ‘탐색꾼’이었다. 2003년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석 달 동안 9만여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비온 뒤 생긴 물웅덩이를 뛰어넘는 남자와 그 물에 비친 잔영, 그림자 진 건물과 그 건물들 사이를 빛처럼 튕겨나가는 사람…. 그의 미학은 ‘60분의 1초 기술’ ‘결정적 순간’ 등의 문구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라는 사진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르 몽드는 그의 라벨처럼 되어버린 결정적 순간에 대해 흥미로운 이견을 내놓았다. 도그마를 거부했던 카르티에-브레송은 그가 쓴 어느 글에서도 이 말을 고안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1952년 출판된 <후다닥 이미지들>(프랑스어 ‘알-라-소베트’는 우리말로 부랴부랴, 후다닥 정도로 옮길 수 있다)에서 이 세상에 결정적이지 않은 순간은 하나도 없다는 한 17세기 작가의 말을 인용했을 뿐이다. 이 제목이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가 제창한 이론처럼 굳어졌다.

격류처럼 흘러넘칠 듯한 삶의 충동성과 그것을 휘어잡는 고도의 절제력. 60분의 1초의 순발력으로 잡아낸 결정적 순간의 ‘우연성’은 기하학적 구도와 프레임의 절제력 안에서 ‘영원성’으로 승화된다.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은 사진학도들만의 공부 대상은 아니다. 운동과 정지, 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이라는 두 상호모순적 힘의 공존을 다룬 그의 작품들은 현대의 모든 진지한 예술이 고민하는 가장 절실한 문제들이기도 하다.

카르티에-브레송이 사진을 만난 것은 1932년 마르세유 시장에서 우연히 라이카 카메라를 구입하면서부터였다. 셔터 소리가 덜 나는 이 운명의 물건은 이후 평생 그의 손을 떠나지 않고 그의 ‘눈’이 되었다.

그의 사진은 모두 거리에서 나왔다. ‘사진작가는 신경통이라는 직업병을 앓는 현장인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현행범처럼 신경이 팽팽해져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녔다. 그가 거리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은 아라베스크 원무를 추는 무희처럼 현란했다. 자아를 잃고 오로지 대상에만 몰두한 결과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나에게 빛은 라스코 동굴 벽화, 파올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푸생 그리고 세잔이었다”라고 그는 생전에 말했다. 그리고 세계를 보는 눈을 일깨워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이제 그 빛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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