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 웨인 왕 감독 <스모크>
  • 李世龍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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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앵글’로 그린 삶의 삽화들
웨인 왕 감독은 홍콩 출신 미국 감독이다. 그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조이럭 클럽>에서 미국에 뿌리 내린 중국인들의 모습을 섬세하고 진지하게 그려내 세계의 눈길을 모았다.

그의 새 영화 <스모크>는 이제 그의 눈이 중국계 이민자들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뉴욕 브루클린 3번가 모퉁이에 자리잡은 담배가게. 14년간 이곳에서 담배를 팔아온 오기(하비 케이텔)와 소설을 쓰는 단골 손님 폴(윌리엄 허트)을 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때는 잘 나가는 작가였지만 임신한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손을 놓고 있는 폴과, 담배가게에서 동네 건달들과 수다나 떨고 살아 가는 오기. 이들 사이에 흑인 청년 라시드(해럴드 페리누)가 끼여든다. 이 청년은 가짜 이름을 여러 개 사용하며 온갖 허풍을 떨어대는데, 음주 운전으로 아내를 죽인 뒤 죄책감에 사로잡혀 가출한 아버지 사일러스(포레스트 휘태커)를 찾아 헤매고 있다.

사건은 교통 사고 직전에 우연히 폴을 구해준 라시드가 폴의 집에 머무르고, 18년 만에 첫 남자인 오기를 찾아온 여자 루비가 딸 얘기를 꺼내며 난마처럼 뒤엉킨다.

마치 퍼즐의 한 부분을 조각조각 맞춰 나가듯이, 이들의 사연 조각을 하나씩 맞추면서 ‘인생’이라는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스모크>는, 등장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어울리며 이런 삶, 저런 인생을 빚어낸다.

새 가정을 꾸민 아버지를 뒤로 하고 다시 폴을 찾아온 라시드는 담배가게 종업원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폴은 자신의 서재에 숨겨 놓은 라시드의 돈뭉치를 발견한다. 그 돈은 강도가 도망치면서 흘린 것을 라시드가 주운 것으로, 대학 진학 때 사용할 비자금이었다.
담배가게는 미합중국의 모델하우스

그러나 인생이란 뜻대로만 되지 않는 법. 라시드는 오기가 전재산을 털어 밀수한 쿠바산 시가를 물에 적셔 못쓰게 만든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라시드는 비자금 5천달러로 변상을 하고, 돈을 받은 오기는 그 돈을 옛 애인인 루비에게 준다.

폴은 다시 글을 쓴다. 그는 <뉴욕 타임스>로부터 크리스마스에 얽힌 에세이를 청탁 받고 오기를 찾아간다. 마주앉은 두 사람. 오기는 폴에게 자신이 14년 동안 한결같이 아침 8시에 3번가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게 된 경위를 들려준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라는 아름다운 사연을….

웨인 왕은 <조이럭 클럽>에서 여인들이 모여서 마작을 하는 ‘클럽’이라는 공간을 마련하고 사연이 제각각인 인물들을 불러 모았듯이, <스모크>에서도 담배가게라는 특정 공간을 설정하고 출신과 배경이 다른 인종들을 집합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따라서 이 작품 속의 담배가게는 오기라는 사내가 생계 수단으로 열어놓은 상점의 구실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종의 용광로’로 불리는 미합중국을 축약한 공간 기능을 갖는다. 이런 공간 속에서 웨인 왕 감독은 담배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생살이의 미묘한 기미를 잡아내어 풍부한 삽화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등장 인물의 엇갈림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결합한다. 피붙이, 생부와 생모 찾기, 가족의 중요함을 보물찾기처럼 숨겨놓고 그 정면에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연기자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조절하는 연출 솜씨와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중국 영화(대만과 홍콩의 일부 감독을 포함하여)의 특징인 풍부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스모크>는, 눈높이 앵글을 기본으로 하여 두 사람(two shot) 세 사람(three shot) 혹은 여러 사람(group shot)을 한 화면 속에 배치한다. 그럼으로써 삶이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생겨나는 ‘생물(生物)’임을 시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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