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카우리스마키 감독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
  • 전찬일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6.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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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전례 없는 캐릭터로 격조 높은 웃음 직조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89년)는 로큰롤이라는 말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세계 최악의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가 ‘천국보다 낯선’ 미국을 거쳐 멕시코에 이르는 여정을 블랙 코미디로 펼쳐 보이는 로드 무비다. 제목부터 영화의 두 가지 축 ‘재미’와 ‘낯설게 하기’를 지시한다.

감독은 영화 변방 핀란드를 세계 영화 역사에 등재시킨 카우리스마키 형제 중 동생 아키 카우리스마키(39)이다. 일반 관객에게는 처음 선보이지만,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열렬히 숭배되는 ‘인디’다. 90년대에 들어 80년대 타르코프스키가 재발견되었을 때 못지 않은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유럽 영화의 마지막 르네상스’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올해 칸 영화제에 <구름은 걷히고(Drifting Clouds)>가 경쟁 부분에 출품되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인디’답게 저예산 영화를 속전속결로 찍는 것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잉그마르 베리만이 쓰던 낡은 35㎜ 아리플렉스 카메라로 60만 달러를 들여 30일 만에 만들었다) 카우리스마키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에서 영화 사상 가장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특이한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딱따구리 주둥이 모양으로 앞머리가 긴 헤어 스타일과, 타이어를 펑크내리만큼 뾰죽하고 길쭉한 콧부리를 한 요상한 구두, 연미복 같은 의상의 파격적인 캐릭터를.

카우보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발하고, 때로는 부조리극처럼 ‘황당무계한’ 촌극들을 별 고민 없이 즐기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 충분히 웃을 수 있을 뿐더러 ‘이국적 정취’로 인해 호기심도 강하게 유지되니까. 슬라브족 민속 음악에서부터 로큰롤·컨트리 뮤직·블루스·하드 록·라틴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지는 음악 메뉴 덕에 즐거움이 배가된다.

이 정도로 그친다면 영화의 맛을 만끽한 것이 아니다. ‘낯설게 하기’에 주목할 때 비로소 진정한 맛깔이 우러난다. 채플린에게서 볼 수 있는 페이소스와 쓸쓸함을 머금은 깊은 웃음이랄까. 웃음의 격을 높여 주는 것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낯설게 하기 장치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의 무표정과 양식화한 연기. 코미디지만 그들은 애써 관객을 웃기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컷 웃을 수 있다.

서른다섯 가지 소제목으로 ‘낯설게’ 완성

영화가 끝난 뒤의 상황을 설명하는 마지막 세 문장을 포함해, 무려 서른다섯 가지 소제목은 가장 중요한 낯설게 하기 장치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성으로서 거리 유지 구실을 하는 형식 요인일 뿐 아니라, 캐릭터의 경제성, 영화 내용과 스타일의 경제성을 실현 가능케 해준 본질적 기능 인자다. 그 덕에 인물들은 대사를 별로 하지 않고도 관객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 과감한 생략과 78분밖에 안되는 짧은 상영 시간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쯤 해서 현대 영화의 대명사 장 뤽 고다르의 (혹은, 그를 통해 ‘낯설게 하기’의 원조인 ‘소격 효과(V­effekt)’를 확립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력 내지 흔적을 감지한다면 영화 보기는 지적인 영화 읽기로까지 발전할 터이다. 카우리스마키에게는 고다르의 통렬한 사회 비판성과 지성이 다소 부족하지만, 고다르에게 없는 통쾌한 재미로 그 결핍을 상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한다면, 영화를 90% 이상은 수용하고 소화한 셈이다.

자무시(카메오로서 중고 자동차 딜러로 출연하고 있다)의 <천국보다 낯선>과 비교하면서 미국을 관찰하고,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와 고다르 등 많은 영화에 대한 인용과 풍자를 찾아보며, 흑인·백인·멕시코인종을 각각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카우리스마키의 외도에 눈길을 준다면, 영화의 사회 비판성 내지 정치성 또한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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