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펴낸 윤흥길씨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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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펴낸 윤흥길씨/“사랑 부재 시대에 필요한 해학성 살렸다”
아예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강의 때문에 충남 서산에 묵어야 했지만, 남들처럼 따로 방을 구하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줄였고, 그것도 새우잠을 잤다. 연구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많았다.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관리에 혹독했다. 교수가 되면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문단의 불문율을 깨기 위한 각오였다.

최근 장편소설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전 2권·현대문학)을 펴낸 작가 윤흥길씨(55·한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요즘 ‘낯꽃’(이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사투리. 표정이라는 뜻)이 환하다. 문학적 열정이 되살아난 데다가 이번에 펴낸 소설에 대한 반응이 좋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로…>는 작가가 83년에 발표했던 <완장>의 속편. 30대 이상 독자들에게 <완장>은 소설보다는 드라마로 각인되어 있다. 80년대 중반과 후반, 두 차례에 걸쳐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다. 작가는 “중년층 독자들이 반가워할 것이란 기대는 있었다. 다만 요즘 신세대들의 독후감이 어떨는지 궁금했다”라고 말했다.

“신세대의 독서 유행과 취향 따르지 않았다”

이번 소설은 신세대를 흡인하는 장치가 거의 없다. 우선 소설의 언어가 신세대들에게 불친절하다. ‘얀정없이’‘씨억씨억’‘에멜무지로’같은 낱말이 표준어인지 아닌지를 자신있게 판정할 수 있는 젊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위에 소개한 단어들은 표준말이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은 전라도 사투리쯤으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다. ‘신간 편한’‘짱짜란허니’와 같은 사투리나 ‘솥단지 옆에다 엿가래 붙여놓고 나온 어린애’‘삼베 바지에 방귀 새듯’과 같은 한 세대 이전의 속담과 유행어 들은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와 접점이 많지 않다.

하지만 신세대 독자들에 대한 작가의 우려는 말끔히 가셨다. 소설이 출간된 이후, 젊은 독자들을 모니터해 본 결과, 사투리를 명확히 해석할 수는 없지만 읽을수록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반응에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루고 있어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반응도 있었다. “신세대 독자들에 대한 염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자의 유행과 취향에 맞출 수는 없었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는 그동안 추구해온 문제 의식에 충실하기로 했다. 윤흥길 문학을 지탱하는 주춧돌 가운데 하나가 해학성이다. 토착 정서를 문학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그는 자신뿐 아니라 동세대 작가들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여기고 있다.

<빛 가운데…>는 91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종말론을 소재로 하고 있다. <완장>의 임종술과 김부월. ‘쥐꼬리만한 권력’을 행사하느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던 임종술의 그 ‘완장病’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눈앞의 이득에만 급급한 술집 작부 출신 김부월도 변한 것이 없다. 마지막 사업으로 포장마차를 하다가 둘러엎은 임종술과 김부월은, 마침내 한강변으로 나가 자살을 기도하려는 순간, 박장로라는 ‘토정비결에 나오는 바로 그 귀인’을 만나 삶 속으로 재진입한다.

기독교에는 관심조차 없던 두 사람은 박장로 부부에 의해 결국 신자가 되지만 ‘자신이 바보인 줄을 모르는, 진짜 바보’인 김부월은 간증으로 일약 유명해지자 종말론 교회의 가두 선교사로 변신한다. 김부월 못지 않은 임종술 또한, 오랜만에 차게 된 ‘완장’(빌딩 경비실장)을 벗어버리고 종말론에 동참한다. 하지만 두 부부가 맞닥뜨리게 될 결과는 뻔하다.

소설의 서사 구조는 매우 평이하다. “종말론의 결과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태 소설이 갖는 해학성을 살리고자 애썼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다만 결말에서 원환(圓環)형 구조를 선택해, 결말을 독자들 판단에 맡기고 있다. 즉 임종술 부부가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만, 종말론은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는 비관론을 동시에 제시한 것이다.
윤흥길씨는 우리 전통 문학의 가장 큰 특성으로 해학성을 든다. 윤씨에 따르면, 풍자가 공격적이고 잔인해 육식 동물적 속성을 지녔다면 해학은 방어적이어서 초식 동물에 가깝다. 이번 소설에서 김부월과 임종술이 그러하듯이 해학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튀어나온다. 해학은 1차적으로 웃음을 유발하지만, 해학에는 연민과 서글픔, 억압하는 대상에 대한 용서까지 동반하는 끈질긴 생명력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혼돈의 시대, 사랑이 부재하는 시대에 해학만큼 필요한 것이 없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윤흥길 문학에서 분단 문제와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이다. 일찍이 6·25 때 기독교에 귀의한 그는 문학 청년 시절, 교회와 등을 졌다. 교회는 그에게 육친의 아버지와 동일시되었다. ‘꾀죄죄한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유독 장남인 그에게 엄격해서, 소년 윤흥길은 여러 번 가출을 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선교 문학을 요구했다.

해학의 밑바탕은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

육친의 아버지와 영적인 아버지 모두 작가 윤흥길을 억압했다. 육친의 아버지와는, 윤흥길씨가 가장이 된 이후 화해했다. 무능력한 아버지가 장남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기독교 문학에 대한 입장도 명쾌하게 정리했다.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을 여실하게 잘 형상화하는 것이, 곧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문학 생애에서 84년은 중대한 고비였다. 79년부터 개인적으로 교류하고 있던 일본 작가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호리존테 페스티벌’에 참여했다가 좌반신 불수에 걸린 것이다. 독일 행사가 워낙 빡빡한 데다가 매일 행사가 끝난 뒤 독일 교민들과 통일 문제로 격론을 벌이다가 몸에 탈이 난 것이다. 84년 이후 그의 80년대는 좌반신 불수 후유증으로 채워졌다. 시력을 회복하고, 풍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는 새삼 신앙의 힘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그에게 문학과 신앙은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의 문학이 추구하는 해학성과 그리스도의 정신은 하나였다. 우리의 전통적 정서인 해학의 밑바탕에는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단, 즉 종말론을 다룬 이번 소설을 기독교인들이 많이 읽었으면 한다. 김부월이 종말론 신자가 된 데에는 기성 교회에도 얼마 만큼의 책임이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윤흥길씨는 올해로 문학 생활 30년째를 맞고 있다. <빛 가운데로…>는 그의 문학 생애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현재 충남 서산 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윤흥길씨는 ‘완장’을 차고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그 완장은 소설 속의 임종술이 차고 있던 권력의 은유로서의 완장은 물론 아니다. 윤씨는 문학 청년기에 갖고 있던 열정과 자신감, 그리고 집중력을 회복한 것이다.

<빛 가운데로…>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90년대 이후 문학은 30대, 그것도 여성 작가들의 독무대였다. 70년대 한국 문학의 전성기를 건설했던 중견 작가들이 독서 시장에서 퇴장되는 것이 아닌가라며 안타까워했던 것은 중견 작가들뿐만이 아니었다. 문학이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는 현상은 한국 문학 전체를 놓고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윤흥길씨의 환한 낯꽃은 그래서 중견 작가 전체의 표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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