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타이타닉>은 없다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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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 빈약해 블록버스터 제작 불가능…특수 효과 기술은 큰 발전
얼마 전 개봉한 <퇴마록>의 특수 효과가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다는 평판을 얻으면서 특수 효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시인 이 상의 시에 얽힌 비밀을 풀어 가는 영화 <건축 무한 육각면체의 비밀>(연출 유상욱)과 한국과 북한의 첩보전을 소재로 한 <쉬리>(연출 강제규)에는 각각 10여 분에 이르는 특수 효과 장면과 대규모 액션 촬영이 포함될 예정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온다’는 <퇴마록>의 광고 문구는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다. 특수 효과에 비중을 두고 제작되는 영화들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내세우는 것은 블록버스터와 특수 효과의 상관 관계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수천 개 극장에서 일시에 개봉해 단기간에 이익을 뽑아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몰아치기’ 전략에는 시각 이미지가 현란한 SF나 재난 영화 장르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화산 폭발, 거대한 공룡, 외계인과의 전투 등 스펙터클한 장면은 그 자체로 뛰어난 광고 효과를 발휘한다.

특수 효과, <퇴마록>에서 ‘주연급’ 활약

일찌감치 SFX의 상품성을 간파한 할리우드는 해마다 눈부신 기법의 SFX 영화를 쏟아냈다(SFX는 특수 효과의 원어(Special effect)를 발음 나는 대로 읽은 것이다). 초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범으로 꼽히는 <죠스>나 90년대를 대표하는 블록버스터 <에어리언> <터미네이터> <쥐라기 공원>, 올 여름 간판을 올린 <고질라> <딥 임팩트> <아마게돈> <로스트 인 스페이스> <스타쉽 트루퍼즈> 등은 수천 개 극장에서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다.

SFX 영화의 몰아치기 전략은 거대 자본과 광대한 시장을 장악한 할리우드에는 밑질 것이 전혀 없는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일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SFX 영화는 애초부터 돈 놓고 돈 먹는 게임이다. 블록버스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SFX 영화는 총 제작비가 천문학적일 뿐 아니라 세트를 비롯한 특수 효과 비용이 다른 부문을 압도한다. <타이타닉>은 총 제작비가 2억8천만 달러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배와 세트 제작에만 7천만 달러가 들었다. 돈도 없고, 시장도 빈약한 한국에서 ‘크게 투자해서 왕창 버는’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는 어불성설인 것이다. <퇴마록>의 특수 효과 비용은 제작비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블록버스터를 내세우면서 굳이 한국형이라는 수사를 동원한 것은 이처럼 블록버스터답지 않은 알뜰한 규모를 감안했기 때문인 셈이다.
하지만 <퇴마록>의 특수 효과는, 들인 비용을 감안한다면 기대 이상이다. <퇴마록>은 한국 영화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하던 특수 효과를 단번에 ‘주연급’으로 끌어올렸다. 할리우드의 공룡이나 회오리, 우주선 등과 같은 ‘주인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특수 효과의 호소력은 이전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 특수 효과는 제작비를 줄이는 데 활용되거나 영화의 맛을 살리는 양념 구실에 그쳤다. 디지털 특수 효과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도 10년 남짓하다. 첫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티켓>(86). 모니터 화면을 카메라로 찍는 원시적인 방식이어서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말이 민망한 수준이었다.

<구미호>는 특수 효과를 전면에 내세운 첫 영화였다. 영화사 신씨네는 컴퓨터 그래픽스라는 자회사를 세우고 시스템공학연구소와 연계해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컴퓨터 그래픽(CG)을 적극 활용한 첫 작품’이라는 데 만족해야 했다. 뒤를 이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블루 시걸> 등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컴퓨터 그래픽 화면이 한껏 눈이 높아진 관객의 성에 차지 않았을 뿐 아니라 드라마도 빈약했기 때문이다.

특수 효과가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은행나무 침대>와 <꽃잎>에 이르러서이다. <은행나무 침대>에서 혼이 사람의 몸을 통과하고, 침대에서 혼이 분리되는 장면이 없다면 작품의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꽃잎>의 일그러진 이미지들은 정신 착란에 빠진 소녀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적절하게 활용되었다.

이밖에 <피아노 맨> <축제> <비트> <창> <인샬라> <박봉곤 가출 사건> <총잡이> <체인지> 등에서도 특수 효과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시대별로 변천을 거듭해 온 도시 풍경을 그려내거나(<축제>), 사람이 전철에 뛰어드는 장면(<비트>) 등은 실제 촬영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재털이가 날아가고(), 총알이 날아가는 모습(<총잡이>)은 과장으로 극적인 효과를 높인 예다.

<퇴마록>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기법을 망라했다. 움직이는 물체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데 유용한 렌더맨 시스템, 잘린 손가락을 표현하는 데 활용된 크로마키 기법, 월향검의 활약상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3D 그래픽 등등….

<퇴마록> 시각 효과 감독 강종익씨(34)는 “영화를 기획할 때 우리 기술로 영화에 필요한 시각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할리우드만큼은 못되어도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작업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현재의 기술력을 망라한 만큼, 거꾸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특수 효과 회사 줄줄이 도산

<건축 무한 육각면체의 비밀>에서 특수 효과를 맡은 신경식씨(제로웍픽쳐스 대표)는 “영화에서 수요가 없었을 뿐 특수 효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라고 말해 발전의 여지가 많음을 시사했다. 신씨가 대표로 있는 제로웍픽쳐스를 비롯해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담당했던 LIM·비손텍 등은 모두 광고 제작으로 발판을 다진 회사이다. 미국의 경우 영화가 첨단 기법을 개발해 공급해 온 반면, 우리는 광고에서 기술을 쌓아 영화에 진출하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신씨는 “영화만 놓고 볼 때는 특수 효과의 역사가 일천하지만 광고에서 노하우를 쌓아 왔기 때문에 앞으로는 발전 속도가 빠를 수 있다”라고 말한다.

물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다. 우선 광고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기법이 주로 활용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의 기술을 쌓을 기회가 적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흔히 특수 효과를 CG라고 부르는데, 엄밀하게 말해 CG는 특수 효과의 한 갈래일 뿐이다. 특수 효과에는 고전적인 매트 프린팅에서부터 미니어처(소품), 파이로 테크닉(폭파 기술), CG 등이 포함된다. 또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스톱 모션 촬영, 모션 캡처 카메라 촬영 등 다양한 촬영 기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폭파되는 건물을 피해 사람들이 달아나는 장면이 있다고 치자. 실제 건물을 폭파하기는 어려우므로 정교한 건물 미니어처가 필요하다. 폭파에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해 외국에는 파이로 테크닉을 전담하는 팀이 따로 있다. 달아나는 배우는 세트에서 따로 찍어야 한다(그린 프린트 기법). 그리고 미니어처 폭발을 촬영한 그림과 배우의 연기를 컴퓨터로 합성한다(디지털 합성). 미니어처 제작술, 폭파 기술, 디지털 합성 등 서너 가지 기술을 합쳐야 한 장면을 매끄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은 영화가 아니면 경험을 쌓기 어렵다. 특수 효과 비중이 큰 액션 스릴러 <쉬리>의 연출을 맡은 강제규 감독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각 부문의 기술력은 웬만한데 이를 결합해 한 화면에 담는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특수 효과 분야에서 의욕적으로 작업해 왔던 회사 가운데는 설비 투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 곳이 많다. 한국 영화가 멜러·코미디 일색이었기에 빚어진 현상이다. “채산성을 생각하면 영화의 특수 효과는 돈이 되지 않는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제로웍픽쳐스 신경식 대표의 말은 열악한 환경을 이기려는 결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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