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테크노 스릴러’ <남북>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9.07.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해 교전 예측한 장편 소설 <남북>/심리 묘사 배제, 전투 상황 세밀히 전달
6월13일 05시26분,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 남동쪽 45㎞ 해상. 경북함이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 고속정들은 서쪽으로 돌진했다. 경북함 반대쪽에 있던 성남함이 함포를 쏘기 시작했다. 함수와 함미에 1문씩 장착된 76mm 자동 속사포가 북한 고속정들에 불세례를 퍼부었다. 실제 상황이 아니다. 소설 <남북>(전 3권·들녘)의 ‘서해 5도 해전’ 대목에 나오는 장면이다.

<남북>은 출간된 시점이 절묘했다. 마지막 3권이 나온 6월 중순 무렵 실제로 남북한 해군이 서해 5도 앞바다에서 교전했다. 물론 작가가 서해 사태를 미리 알고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해상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실제와 너무 들어맞는다. 들이받기 전술이 나오지 않을 뿐, 한국 해군이 월등한 장비로 북한 해군을 격파하는 세부 과정이 서해 사태와 거의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그렇지만 <남북>은 서해 5도에 한정되는 국지전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남북한 전면전이 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줄거리는 이렇다. 4월21일 03시58분, 미국 스텔스 전폭기가 밤하늘을 뚫고 평안북도 영변 핵시설을 폭격한다. 곧 휴전선 일대에 비상 계엄령이 내리고 한국 전역에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계속된다. 이 바람에 한국 증권 시장이 폭락해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된다. 증권 회사에 다니던 주인공 김승욱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다. 국제 투기 자본은 미국이 영변을 폭격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한국 주식 시장에서 한몫 단단히 챙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북한군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 시간이 가면서 휴전선의 경계 태세도 점점 무뎌지기 시작한다.

장마철로 접어들기 시작한 6월 중순, 북한은 모든 전선에서 포를 쏘면서 기습 남침한다. 인민군 공군 자살 특공대와 스커드 미사일이 한국군 레이더 기지를 파괴한다. 북한 특수부대가 대규모로 침투해 한국군 통신·지휘 시설을 마비시키고 후방을 교란한다. 북한 잠수함들이 부산항에 기뢰를 부설해 한국군 보급 통로를 묶어 버린다. 또 북한 잠수정이 인천항 갑문을 폭파하고 자신들도 폭사한다. 때를 맞추어 동부 전선에서는 인민군 경보병 여단이 물밀듯 내려온다. 대규모 포격을 받은 서울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된다. 그러나 한국군 지휘부는 인민군 지상군 주력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한국 공군도 장마철이어서 제대로 지상전을 지원하지 못해 국군은 곳곳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5명이 함께 쓴 공동 작품이다. 대표 집필은 소설 <동해>를 쓴 김경진씨(36)가 맡았지만 육·해·공 전투를 전문으로 다룬 필자가 따로 있다. 해상전은 소설 <동해>에 참여했던 진병관씨(31)가, 전략 전술은 신재호씨(28), 특수전은 손중극씨(27), 공중전은 송병규씨(26)가 썼다. 김경진씨를 빼고는 거의 20대 후반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컴퓨터와 전자 오락, 군사 분야 마니아이다. 그런 만큼 만난 계기도 특이하다. PC통신 하이텔 ‘군사 동호회’가 바로 이들이 만난 공간이다.

공동 필자 5명 가운데 처음 뭉친 사람은 김경진씨와 진병관씨였다. 두 사람은 96년 8월 무렵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잠수함 전쟁을 다룬 소설 <동해>를 98년 9월에 내놓았다. <동해>는 ‘대박’을 터뜨렸다. 단박에 베스트 셀러로 올랐다. <동해>에서 성과를 본 두 사람은 나머지 세 사람을 끌어들여 <남북>을 쓰기 시작했다. <남북> 필진은 한국 최초의 전쟁 전문 소설가

<남북>은 개연성 있는 전쟁 시나리오와 실제 군부대 이름과 위치, 각종 무기 사용 방법까지 세밀하게 열거했다. 군사 기밀 사항을 노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들은 불법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았다. 모두 공개된 자료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모은 것이다. 필진은 “신문 3개만 끼워 맞추면 군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부대 이름까지 알 수 있다. 이는 모두 공개된 자료들이다. 하지만 공군 비행장의 경우 지명만 나열하고 세부 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공중전을 쓴 송병규씨는 항공공학 석사 학위를 가진 비행기 전문가이지만, 나머지 필진은 모두 컴퓨터를 이용해 대부분의 자료를 모았다. 이는 미국 같은 무기 수출 대국들이 첨단 무기의 세부 사항을 인터넷에 상세하게 올려 놓고 있어 가능했다. 소설에 나오는 F16과 미그29기가 공중전을 벌이는 상황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많이 나와 있다. 심지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컴퓨터 전쟁 게임도 있다.

<남북> 필진은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전쟁 전문 소설가로 볼 수 있다. 한국에는 지금까지 이런 류의 소설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작품에 대한 평론도 없다. 이런 소설을 ‘테크노 스릴러’라고 하는데, 외국에서는 <붉은 폭풍>을 쓴 톰 클랜시 등 많은 작가가 활동하고 있다. 이런 소설은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다.

새로 등장한 장르인 만큼 <남북>은 눈여겨 볼 면이 많다. 우선 전쟁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 인물이 엄청나게 많고, 특정인에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도 않는다. 심리 묘사와 성격 묘사도 일부러 피하고 있다. 병사가 죽어가는 과정은 눈에 보이듯이 그리지만, 이들이 겪는 갈등과 아픔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묘사가 다큐멘터리적이다. 실제 전투에 가깝게 하기 위해 그렇게 썼다는 것이다. 대표 집필자 김경진씨는 “나는 문학 수업을 받은 적이 없고 문학 이론도 모른다. 또 문장과 문체에 대한 자신도 없다. 전쟁과 인간성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예술 작품은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전문성이다”라고 말했다. 구성 엉성하고 개연성 떨어져

그래서인지 <남북>에는 고뇌하는 인간이 없다. 포연 속에 피고 지는 남녀 간의 눈물겨운 사랑도 없다. 주인공 김승욱과 여자 친구 최지은의 사랑이 있기는 하되 전혀 감동적이지 않다. 남자는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해서 여자를 만나고, 여자도 적당히 계산하며 양다리를 걸친다. 전쟁이 터지자 남자는 예비군으로 동원되고, 여자는 기다리겠다는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남자를 보낸다. 한마디로 시덥지 않은 사랑이다.

전쟁을 전문으로 다루었다지만 아쉬운 점도 많다. 구성이 엉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지점도 여러 군데 발견된다. 치밀함이 외국 테크노 스릴러에 미치지 못하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극적 반전도 없다. 무엇보다 국군이 반격을 시작하고 북진 통일을 하는 과정 묘사가 엉성하고, 너무 쉽게 전쟁이 끝나 버린다.

하지만 이들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앞으로 이들처럼 전쟁을 전문으로 다루는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많다. 또 이런 류의 소설은 영상 산업과 결합하기가 쉽다. 전쟁 영화 시나리오가 부족해 허덕여 온 한국 영화계에 이는 분명 희소식이다.

<남북> 필진이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했지만 이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울림은 있다. 평화문제연구소 신영석 소장은 “<남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전쟁의 긴박함을 읽는 재미가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남북>의 전투 현장은 너무 생생하다. 남북한 젊은이들이 포탄에 사지가 찢기고, 저격수의 총격으로 머리가 터지고, 탱크전에서 온몸이 숯덩이가 되어 숨져 간다. <남북>이 주는 교훈은 내집 앞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나 또는 내 주변 사람들이 전쟁터로 동원되는 이런 상황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