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연민의 차고 더운 이중주
  • 이문재 (moon@sisapress.com)
  • 승인 2003.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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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씨의 새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
파라텍스트, 이른바 곁다리 텍스트에 유의하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그는 다음 두 유형 가운데 하나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이거나, 아니면 문외한이다. 언론인과 에세이스트를 겸하고 있는 소설가 고종석씨(45)가 최근에 펴낸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사진) 앞에서는 특히 파라텍스트의 간섭에 신경을 써야 한다.

텍스트의 곁다리는 작가의 이미지에서 책 앞뒤 표지 문안, 각종 매체의 기사, 광고, 독자들의 입소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고종석씨는 몇 가지가 추가된다. 언론인(그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다)으로서 쓰는 칼럼이 있고, 또 에세이스트로서 펴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고씨가 발표한 글과 저서 들에는 전라도나 안티, 마이너리티 등을 키워드로 하는 논쟁적인 테마가 제법 있다. 이 ‘비소설’들은 소설가 고종석, 아니 고종석의 소설로 들어가는 문일 때도 있지만, 벽일 때도 있다.인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인 고씨의 사유와 문장에 박수를 보내는 독자들에게 이번 소설은 새로운 문이다. ‘차가운 언어’를 구사해온 지식인에게 이런 육체적 온기, 즉 연민이 다 있었구나, 하는 독후감이 새삼스러울 것이다(6년 전에 나온 소설집 <제망매>를 읽은 독자라면 반가움이 조금 덜하겠지만).

하지만 고씨의 칼럼과 저서에 높은 점수를 주는 독자들이라면 김이 빠질 수도 있다. 이번 소설에서 ‘복고주의’가 눈에 거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파라텍스트의 간섭을 무시하고 순수한 문학 독자이기를 고수하겠다고 다짐해도 그냥 넘어가기 힘든 ‘곁다리’가 있다. 책 앞에 박혀 있는 헌사와 인용시 말이다. ‘한 이십 년쯤 전의, 근희 누님께’와 ‘나뭇가지 위에 얹힌 돌덩이처럼 나는 깨어 있네-조 은’. 앞의 헌사는 이번 소설들이 여성을 중심으로 한 기억의 생태학이라는 창작론을 암시한다. 인용시는 조 은 시인의 작품인데, 작가(혹은 그 세대)의 사회·심리적 정체성을 은유하고 있다.

주변인 삶 통해 잃어버린 기억 복원

고종석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화자의 가족이다. 어머니·누이·딸·전처·아내 등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그런데 그 여성들은 정상적이지 않다. 다리를 저는 노처녀 여동생(<엘리아의 제야>), 외국 남성과 세 번 결혼한 잘 생긴 누이(<누이 생각>), 20대 초반에 실명하는 딸(<아빠와 크레파스>), 소아 당뇨에 시달리는 딸(<엘리아의 제야>) 등등. 그렇다고 저 여성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남성(‘나’ 혹은 아버지)이 전통적 권위나 세속적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남성 또한 주변인이다.

불구 여성들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시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소설은 육체성을 획득하는데, 이 육체성은 요즘 소설에서 경험하기 힘든 감동을 빚어낸다. 가령, 유년기에 한쪽 눈을 잃은 딸아이가 대학생이 된 이후 나머지 한쪽 시력마저 놓친다. 그때 딸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아빠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네요’(<아빠와 크레파스>). 이같은 대목이 몇 군데 있는데, 그때마다 소설 읽기는 중단된다. 코가 시큰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차가운’ 에세이스트와 ‘따뜻한’ 소설가 사이에 가로놓인 ‘골’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식인의 속물 근성과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폭로한 <피터 버갓 씨의 한국일기>나, 친구와 보수 언론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파두>의 몇 대목, 전라도 출신이라는 자의식을 세계사적 모순과 연관시키는 <카렌>의 몇몇 페이지에서 인문주의자·자유주의자 고종석과 만날 수 있다.

여기에 ‘나는 시인이다.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지 않았다는 건 내 자부심이다’라고 말하는 계급적 아웃사이더의 자기 인식(<엘리아의 제야>)을 덧붙인다면, 비판적 지식인 고종석과 연민의 시학을 구사하는 소설가 고종석이 두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종석은 고종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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