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미 빼어난 ‘디지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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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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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민병천 / 주연 : 이재은·유지태
인간과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SF 영화는 대다수 <블레이드 러너>에게 빚지고 있다. 아니 <블레이드 러너>의 자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처럼,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획득하려는 사이보그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갈등을 빚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그랬듯이, 그런 시도는 결국 제재를 받게 된다. <내츄럴 시티>의 배경인 2080년의 미래 세계 역시 그렇다. 거리의 매춘부인 시온(이재은)은 사이보그를 사랑했던 아버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블레이드 러너>가 나왔던 1980년대와 달리, 21세기인 지금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점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새로운 자신-아바타로 생활하는 것이 익숙한 요즘, 사이보그와의 사랑은 낯선 말이 아니다. 이미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캐릭터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도 일종의 박해를 받는다.

미래 세계의 암울한 풍경 유려하게 그려내

<내츄럴 시티>에서 사이보그를 사랑하는 R (유지태)가 낯설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다. <유령>으로 데뷔했던 민병천 감독은 R가 어떻게 사이보그인 리아(서 린)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단지, ‘끝이 보이는 사랑’을 하게 된 연인의 슬픔이다.

폐기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리아를 위해, R는 유전자 구조가 동일한 사람을 찾는다. 그 사람의 육체에 리아의 기억을 이식하면, 즉 영혼 더빙을 하면 그들의 사랑은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R가 겨우 찾은 시온을, 무단 이탈한 사이보그 사이퍼가 납치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내츄럴 시티>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R와 리아의 과거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를 전달할 에피소드들도 별로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 음악과,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그 음악에 조응하는 감각적인 영상이 관객을 끌어들인다. 인과 관계와 감정의 축적 등을 전혀 무시하면서 신파적인 스토리로 대중을 매혹시키는 뮤직 비디오에 익숙하다면, <내츄럴 시티>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내츄럴 시티>에서 돋보이는 것은 무엇보다 ‘비주얼’이다. <내츄럴 시티>는 인종과 국경이 무너져버린 미래 세계의 다소 암울한 풍경을 유려하게 그려낸다.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 기동대>의 오마쥬’라고 미리 밝힌 감독의 말처럼, <내츄럴 시티>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시공간이지만 나름으로 독창적인 지평을 그려낸다. 아무리 돈을 많이 쓴다 해도, 할리우드에 비해 ‘저예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래 세계’를 구현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변명은 수긍할 만하다. 거대한 여신상이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이나 물과 돌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액션 장면, 시온이 가꾸는 꽃밭이나 리아가 늘 만지는 아도니스를 키우는 기계 등 작은 소품에서 감정을 끌어내는 재간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위대한 걸작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영상의 풍요함과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는 만족스러운 SF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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