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유머 그리고 ‘뻥’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4.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이가 들면 단순해진다는 말은 현실에서 칭찬보다 조롱하는 뜻이 많다. 하지만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를 보면 유쾌하게 사는 비결이 단순함에 있음을 알게 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2001년)은 <나라야마 부시코> <우나기> <간장선생>으로 친숙한 이마무라 감독(78)의 최신작이다. <나라야마 부시코>(1983년)에서 삶의 원시적 에너지를 집요하게 파고들던 그는, 일흔이 넘어 연출한 <우나기>(1997년)에서부터 따뜻하고 유머러스해졌다는 평을 들었다. <간장선생> (1998년)에서도 전쟁 와중에 환자들에게 무조건 간에 병이 들었다며 링거를 주사하는 능청스러운 의사를 통해 전쟁을 간접 조명했다.

더 단순해진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성인용 동화다. 황당하고 야한 상상력을 동원하는데, 질퍽거리는 느낌 없이 픽픽 웃음만 나온다. 모티브는 단 하나. 욕망이 차오르면 실제로 몸에 물이 차오르는 여자가 있다는 설정이다. 그녀의 이름은 사에코(시미즈 미사)다.

빛나는 통찰력과 포르노적 상상력

실직한 중년 남자 요스케(야쿠쇼 고지)는 위안을 얻고자 떠돌이로 살아가는 절친한 친구를 찾지만 친구는 이미 숨을 거둔 뒤다. 친구는 ‘붉은 다리 옆집에 숨겨둔 엄청난 보물을 찾아서 대신 가지라’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제의 집을 서성거리던 요스케는, 얼떨결에 묘령의 여인에게 이끌려 잠자리를 갖게 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몸에 물이 차오르는 증세를 ‘앓고’ 있다. 게다가 그럴 때면 물건을 훔치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한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 방을 흥건히 적시는 섹스 후, 여자는 자신이 평소 훔친 물건을 쭈욱 늘어놓는다. 사막을 건너듯 황막한 그에게 여자의 증세는 신기하고 새롭다.

남자의 주변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아내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붉은 다리 옆집에 눌러앉는다. 그는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 임시직으로 일한다. 여기에 중요한 일과가 하나 더 있다. 몸에 물이 차올라 다급해진 그녀가 신호를 보내면, 만사 제치고 뛰어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방 안에는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그 따뜻한 물은 집 앞의 개울로 흘러들어 고기들을 살찌운다. 그리고 그 고기를 기력 잃은 늙은 남자들이 개울 옆에 앉아 낚아올리는 것이다.

단순한 가운데서도 통찰은 여전히 빛난다. ‘남을 동정하는 인간은 농땡이를 치지 않는다’는 한 양아치의 인간감별법이 한 예다. 영화의 메시지도 여러 등장 인물을 통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젊었을 때 글줄이나 읽었을 한 노인은 말한다. “복잡한 생각은 모두 소용 없고 즐기는 게 남는 거다. 그런데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즐길 기력이 남아 있지 않더라.”

<우나기>에서 절박한 사랑을 나누었던 야쿠쇼 고지와 시미즈 미사의 콤비 플레이를 다시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은근히 폼을 잡는 일본의 국민 배우 야쿠쇼 고지로 하여금 시도 때도 없이 옷을 벗도록 만든 것도 감독의 유머 감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영화의 포르노적인 상상력은 마지막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영화로 인류학을 한다는 평을 들었던 이마무라 감독은 이제 ‘뻥쟁이’로도 충분히 명성을 누릴 만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