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바지 입고 클럽으로 간 국악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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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정신 돋보인 2004 국악축전 ‘야야야 콘서트’
 
19억원이었다. 열흘 동안 서울 곳곳을 종횡무진하며 펼쳐진 ‘2004 국악축전’에 쓰인 예산은 총 19억원이었다. 공연계에서 19억원은 많다면 많은 돈이지만 적다면 적은 돈이다. 19억원은 서태지나 조용필 같은 대중 가수가 잠실 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한 회 열기에도 부족한 액수다. 대형 야외 오페라의 1막 제작비에도, 대형 뮤지컬의 무대 제작비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국악계에서 19억원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다. 비록 열흘에 나뉘어 집행되었지만 국악 행사에 이 정도 예산이 쓰인 일은 없었다. 국악축전조직위원회는 로또 복권 기금으로 조성된 행사 예산 19억원을 ‘새로운 국악’에 투자했다. 특히 홍대 힙합클럽에서 12시간 동안 밤을 새우며 진행된 ‘야야야(夜夜夜) 콘서트’(10월8일)는 새로운 국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행사로 관심을 모았다.

홍대앞 클럽으로 진출한 국악은 차림새부터 달라져 있었다. 신세대 국악인들은 한복을 벗어버렸다. 가죽 바지에 가죽 부츠를 신은 대금주자, 청바지를 입고 반짝반짝한 펄 화장을 한 소리꾼, 쪽진 머리 대신 퍼머 머리를 하고 나타나 힘차게 헤드뱅잉을 하는 춤꾼, 모두 이채로웠다.

공연은 두 축으로 진행되었다. 힙합에 국악을 접목한 힙합 그룹이 한 축이었고, 국악 현대화의 기수 역할을 하며 국악의 다양한 실험을 선도하는 신세대 국악인들이 다른 한 축이었다. 공연은 자연스럽게 이 두 진영 간의 맞장(배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길놀이 격인 장승 그림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12시간 동안 진행된 ‘야야야 콘서트’는 씻김굿과 흡사했다. 밤새워 열두 거리로 진행되는 전통 굿판과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도 열두 팀이 참가해 열두 마당으로 진행되었다. 공연을 관람한 국악 평론가 김문성씨는 “전통 굿판을 보는 것 같았다. 박수 무당이 뛰는 모습과 힙합 가수가 뛰는 모습이 그렇게 닮아 보일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수 무당과 힙합 가수는 ‘닮은꼴’


 
힙합 그룹 와이낫은 <비나리>로 첫 번째 무대를 장식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비나리>를 힙합 식으로 재현한 와이낫은 파괴적인 꽹과리 소리로 클럽의 분위기를 일거에 제압했다. 대학 풍물패 출신인 와이낫의 리더 주몽은 “내 안에 두 가지 음악이 다 들어 있다. 이 두 음악이 만나서 얼마나 재미있는 판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뒤를 이은 힙합 그룹 네바다51과 가이아 역시 힙합과 국악의 절묘한 만남을 들려주었다.

힙합 그룹들이 물러난 뒤에는 새로운 옷을 입은 국악 무대가 펼쳐졌다. 타악 그룹 훌은 컴퓨터 미디음악과 만난 국악이 얼마나 다양한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지, 그루브한 최신 하우스 음악과도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는지를 선보였다. 훌의 리더 최윤상씨는 “우리 타악의 장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최신 음악과의 접목을 통해 우리 장단의 뛰어난 응용력을 들려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록그룹 백두산 출신으로 국내 최고 기타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도균씨는 ‘일렉트릭 기타 산조’를 들려주었다. 국악을 음악적 귀착지로 삼고 ‘국악 록’을 추구하고 있는 그는 <춘향가>의 <쑥대머리>와 민요 <쾌지나칭칭나네>를 들려주며 신명을 돋우었다. 관객들에게 그는 “오늘 들려준 것은 2004년 버전의 기타 산조였다. 앞으로 더욱 발전된 기타 산조를 들려주겠다”라고 말했다.


국악 퍼포먼스 그룹 타루를 조직해 국악 뮤지컬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신국악을 시도하고 있는 신세대 소리꾼 이자람씨(23)는 국악과 재즈와의 만남을 선보였다. 이씨는 “우리 선소리와 재즈는 즉흥성이 닮아서 서로 잘 어울린다. 국악에 재즈 형식을 입혀 세련미를 더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외국인들도 많이 관람했는데, 이씨의 공연을 본 미국인 프랭크 벤추라 씨(27)는 “호텔 라운지 음악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음악이다”라고 평가했다.

신세대 국악인들의 공연이 끝나자 다시 힙합 그룹과 록 그룹이 무대를 이어받았다. MR J·내 귀에 도청장치·MC 스나이퍼·훌리건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국악과 국악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MC 스나이퍼의 객원 가수 김성은씨(24)는 “이번 공연을 통해 국악을 접하면서 창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창을 배우면 내 표현력을 더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 무대에 오른 타악 퍼포먼스 그룹 대한사람은 화려한 무대와 강렬한 사운드로 가장 많은 갈채를 받았다. 꽹과리·장구·북·드럼 같은 타악기와 처용무·승무·검무·바라춤 등 다양한 춤으로 무장한 이들의 무대에는 힘이 넘쳤다. 공연을 관람한 캐나다인 루베이다 둔포드 씨(31)는 “한국의 전통 음악이 이토록 힘이 넘치는 음악인 줄 처음 알았다”라고 말했다.

 
“어설픈 퓨전은 국악을 더 소외시킬 수 있다”


밤을 꼬박 새운 공연은 국악 그룹 날나리밴드의 ‘뒷전’ 공연으로 끝이 났다. 굿판에서 무당의 공수(덕담, 신의 계시를 그대로 읊어주는 것)에 구경꾼들이 하나가 되듯, 12시간 동안 공연을 지켜본 관객들은 어느덧 우리 가락에 빠져들었다. 관객들은 절로 어깨를 덩실거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힙합 그룹은 이번 공연을 단순히 음악적 실험의 하나로 접근했지만 신세대 국악인들에게 이번 공연은 생존 문제가 걸린 절실한 행사였다. 대한사람의 리더 김성훈씨(27)는 “도제식·주입식 교육 위주인 국악판이 싫어 뛰쳐나왔다. 그러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무얼 먹고 사느냐 하는 절실한 고민에서 우리의 음악은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밤새 공연을 관람한 UCLA 한국음악연구소 이현주 연구원은 “우리 국악은 뿌리째 흔들리거나 뿌리째 뽑혀야 답이 나온다. 이번 공연은 앞으로 우리 국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신세대 국악의 한계를 보여주는 공연이기도 했다. 이번 공연의 예술감독을 맡은 신창렬씨는 “힙합에 국악을 제대로 접목하지 못하고 단순히 국악을 덧씌우는 것에 머물렀다. 국악기가 내는 소리는 음향 효과에 불과했다”라고 말했다. 국악 평론가 김문성씨는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어설픈 퓨전은 관객으로부터 국악을 더욱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국악을 더욱 소외시킬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시켜 주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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