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김영하 시대’ 열리는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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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검은 꽃> 등으로 올해 3개 문학상 석권
“교수가 쓴 책을 읽고 싶어할까요? 지루할 것 같잖아요. 제발 ‘김교수’라고는 쓰지 마세요.” 학교로 찾아갔을 때 작가 김영하씨(36·오른쪽 사진)가 농반진반 말했다. 그는 지난 9월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학교 분위기가 창작을 독려하는 편이다. 교수 되었다고 창작이 위축될 거라는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복장부터 캐주얼해서 전혀 교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디오 세트를 들여놓은 연구실 분위기 또한 일반 교수 연구실과는 달랐다.

작가 김영하의 전성기가 활짝 열렸다. 그는 최근 멕시코 이민사의 비극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장편 소설 <검은 꽃>(문학동네)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지난 8월에는 창작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로 이산문학상을 받았고, 다음 달인 9월에는 단편소설 <보물선>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았으니 올해 들어 세 번째 문학상이다. 1999년에는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국내의 메이저 문학상을 싹쓸이한 셈이다. 1995년 문단에 나온 지 9년 만에 거둔 수확이다. 문학 평론가 방민호 교수(서울대·국문학)는 “한국 문학의 현재와 관련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라고 김씨의 문학을 평가했다(92쪽 기사 참조).
<오빠가 돌아왔다>, 상업적으로도 성공

김영하씨의 소설은 문학적 평가뿐 아니라 상품성까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검은 꽃>은 베스트 셀러에 오른 지 오래이고, 창작집 <오빠가 돌아왔다>도 3만부 정도가 팔렸다. 최근 창작집으로 이 정도 팔린 작가는 성석제씨(<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와 신경숙씨(<풍금이 있던 자리>) 정도가 고작이다. 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시대에 김영하 문학이 팔리는 이유는 뭘까. “크게 실망스럽지 않았고, 특히 매번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고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우리 독자들의 취향이 변했다. 소설가 박민규씨(<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작가)를 만났더니, 한국 문학의 위기 상황을 우루과이 라운드라고 표현하더라. 질 좋은 해외 문학 작품이 동시 번역되면서 국내 작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움베르토 에코·파블로 코엘료·아멜리 노통·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국내 독자들은 이들 작품을 보면서 빠른 시간 안에 다른 입맛을 갖게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국 문학보다 해외 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내 소설이 갖고 있는 한국 문학스럽지 않은, 즉 생소한 기법이나 소재 등이 독자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 같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김영하씨는 데뷔하기 전인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월간 중앙>에 정치무협 소설 <대권무림>을 연재하며 필명을 날린 적이 있다. 정치권의 뒷이야기를 훑을수록 자유분방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 문학 습작에 돌입했다. 대학원 시절 3~4년 습작기를 거친 그는 1995년 단편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데뷔했다.

김영하씨는 소설에서 지리멸렬한 일상과 그 속을 사는 인간의 내면을 속도감 있는 문체와 독특한 소설 기법으로 담아내곤 한다. 이 때문에 그는 문학계 안팎에서 ‘신세대 작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의 문학관은 매우 진지하고 전통적이다. 그는 몇해 전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인터넷 문학 세미나’에 참가해 ‘왜 게임이 문학을 이길 수 없는가’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문학을 ‘고독하고 위대한 개인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라고 정의했다.

“한때 게임이 소설을 대체할 것이라는 논의가 있었는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 게임 서사에서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 인생의 잔혹한 무의미 같은 아이러니를 담아낼 수 없다. 반면 문학은 역설과 부정으로 가득 찬 매혹적인 영역이다. 문학은 인류의 문자 문화가 도달한 가장 조직적이고 난해하고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나는 문학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

동인문학상을 받은 <검은 꽃>은 애초에 영화 시나리오로 준비했던 작품이다. 그는 재미동포 영화감독 이재한씨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며 들려준 멕시코 이민사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지만, 영화화에 실패했다. 그것을 영화가 아닌 소설로 다시 써보자고 작정해 마무리한 것이 <검은 꽃>이다.

그는 영화가 무산된 뒤 본격적인 소설 집필을 위해 멕시코와 과테말라로 날아가 석 달 동안 취재했고, 거기서 소설을 완성했다. 아이러니컬하게 <검은 꽃>은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 이번에도 역시 이재한 감독과 함께.

그는 영화와 이래저래 인연이 많아서, 첫 작품인 <거울 속의 명상>도 곧 한석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곧 개봉하는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이재한 감독)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보물선>은 창작집 <오빠가 돌아왔다>에 수록된 단편으로, 수년 전 벤처 열풍 때 실제 벌어졌던 보물선 사기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그는 테헤란밸리를 취재해 핍진감을 높이는 한편, 근자에 유행인 ‘이순신 현상’을 코믹하게 패러디해 접목했다. “백의종군이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같은 이순신의 전투적 수사들이 정치권을 도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민주주의와도 맞지 않다”라고 말하는 그가 이념과 물신이 팽배한 현 사회를 자신의 방식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1980년대 조명하는 새 소설 집필중

그는 현재 계간 <문학동네>에 새로운 장편 소설을 연재 중이다. “인간은 왜 살인을 저지를까, 죄의식은 뭘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인간의 심연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라고 말하는 그의 ‘야심작’이다. 제목은 <빛의 제국>. 어릴 때 남한에 내려와 운동권 대학생을 거친 뒤 현재는 영화 수입업자로 위장해 있으면서 남파 간첩들에게 전사(前史)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40대 초반 고정 간첩이 주인공이다. 분단 이야기라기보다는, 훨씬 ‘제너럴’한 한국 중년 남성들에 대한 보고서라는 것이 작가의 변. 물론 김영하씨가 대학 86학번이니만큼, ‘플러스 알파’를 기대해도 될 듯하다.

“나는 1980년대 운동권들에 관한 상당히 괜찮은 소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은 아름다웠다거나 숭고했다는 이야기 말고 그들이 범했던 과오나 불안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러나 배수아씨가 <독학자>에서 그렸던 것처럼 비운동권의 시각에서 이분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간첩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의 눈을 통해 1980년대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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