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도둑질혀서 노래를 엮었시유”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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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0주년 기념 <10년이 하루> 공연한 가수 장사익씨
“맘대로 쓰셔유. 소설 쓰셔도 되유.”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 <10년이 하루>의 마지막 연습이 진행되던 서울 영등포구청 근처의 한 스튜디오. 가수 장사익씨(56)가 협연자들과 함께 마지막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이 나이면 남들은 30주년, 40주년 무대를 준비하는데”라며 그는 쑥스러워했다. 장사익씨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20대 이후 한결같던 몸무게가 처음으로 3kg쯤 빠졌다고 한다. 이 날 일정도 밤 9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이번에 그는 10년 동안 발표한 노래들을 갈무리하고 신곡 2곡을 선보인다. 음반을 들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4집을 낼 때까지 남에게 받은 곡이 거의 없다. <봄비> <님은 먼 곳에> 등 옛 대중 가요를 장사익 식으로 빌려 부른 노래는 있을지언정 새 노래를 받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기보를 하지 못한다. 악보 보고 기타를 퉁기는 것은 하지만 떠오르는 악상을 악보에 옮기는 일 따위와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그가, 그 많은 곡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가 뭐라고 작곡이라고 하것시유. 그래서 다 엮었다고 했슈. 가사가 원체 멋지고 클라식하니께 그걸루 웬만치 먹고 들어가는 거쥬.” 그러고 보니 그는 하나같이 시를 가사로 썼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정호승 시인 등 노랫말로 쓴 기성 시인들의 시도 실은 도적질이어유. 돈을 줄라치믄 10만원도 적고, 천만원도 적을 거 아니겄어유.” 하지만 노래를 발표할 때는 꼭 가사를 준 시인을 부른다. 작고한 경우 유가족을 초청한다.
노래방에서는 점수 안 나오는 ‘자발적 박치’

꼭 유명 시인의 시가 아니라고 해도 느낌이 오는 시들은 따로 있다. 그것을 입안에서 중얼거리다 보면 절로 곡조가 붙어 흘러나온다. 그럼 반주하는 이들은? 그 노래를 듣고 박을 쳐주고, 음을 튕겨주면 되는 것이다. 그를 무대로 이끈 피아니스트 임동창, 그가 깊이 따랐던 타악 주자 고(故)김대환, 10년째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모듬북 주자 김규형과 기타리스트 김광석 등이 그렇게 호흡을 맞추어 왔다.

그토록 목청이 좋은 가수지만 그는 노래방에서 점수가 안 나오는 가수로 유명하다. 우스갯소리로 그는 ‘자발적 박치(拍痴)’이고, 고상한 표현으로 ‘메트로놈의 박자에 갇히지 않는, 호흡을 따라 가는 사람’이다. 익히 그런 작업 방식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연습 중인 연주자들 앞에 악보가 놓여 있다. 서울시립합창단 등 외부 참가자가 많다 보니 그들을 위한 악보가 필요해진 것이다.

길이 있으니 편하기는 한데, 반대로 그 길에 갇히는 수가 있다. 이번 무대에 처음 결합한 콘트라베이스 주자 허진호씨. 그의 연주를 듣더니 장사익씨와는 이심전심 사이인 김광석씨가 코치에 나선다. 그의 지시대로 음을 당겨 튕기니 놀랄 만큼 느낌이 살아난다. 장사익씨가 김광석씨를 놓고 ‘다섯쯤 해줬으면 하고 바라면 꼭 열, 열다섯씩 해준다’고 고마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장사익은 40대 중반에 홀연히 등장한 아마추어 소리꾼쯤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지만, 실은 청소년 시절부터 애타게 가수를 꿈꾸어 왔다. 그렇게 좋은 목청을 갖고 마음이 부대끼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보험사 직원, 외판원 등으로 일하고 독서실과 카센터를 전전하다가 급기야 40대 중반 ‘딱 3년만 태평소를 불겠다’며 생업을 걷었을 때는 20여 년 넘게 누르고 눌렀던 화산이 터진 격이었다.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찔레꽃>)을 노래하고,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하는 사내(<섬>)의 뒷모습을 그려내면서 그는 ‘민생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 무대에서 새로 선보인, 야채 파는 아줌마와의 대화를 그린 <희망 한 단>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아줌마, 희망 한단에 얼마래요?’/‘나두 몰러유. 아저씨, 채소나 한 단 사가슈’).

데뷔 초기 그는 어눌한 말투로 ‘떼밀려서 나왔슈’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굳이 가수로서의 욕심을 감추지 않는다. ‘오래 살아 남는 음악은 모두 맑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자신은 혼탁한 요즘의 가요판과 다른 밭을 일구고 있다는 자부심이 읽혔다.

다른 사람의 노래를 받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한테 곡을 부탁했는디 곡이 좋아도 나한테 안 맞을 수도 있고, 거꾸로 그 사람이 바라는 대로 내가 소화를 못할 수도 있고 허니께.” 말인즉슨 겸손하기 짝이 없지만 그가 남다른 고집과 욕심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죽기 직전의 청중 1명 놓고 공연하기도

10년 동안 기억에 남는 무대가 얼마나 될까. 최근 것으로는 2002년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있었던 남북통일축구 개막 무대를 꼽는다. 1996년 음반 사전 심의 철폐를 기념하는 무대였던 <자유> 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무대는 서울대학교. 유명세가 덜할 때라 정태춘씨 등 내로라 하는 가수들이 빼곡한 무대에서 말석을 차지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가 노래를 마치고 났는데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더란다. “한 1분쯤 있다가 박수가 와아 하고 터지는데, 허, 참.”

청중을 딱 한 사람 앉혀놓고 한 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한 대학 교수였는데, 한국에서 그의 공연을 본 뒤 병석에서 그의 노래를 그리워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일본에 무대를 마련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운신조차 못하는 상태였다. 거의 포기한 채 그래도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지라 리허설까지는 마쳤는데, 공연 한 시간 전 홀연 휠체어를 타고 그가 나타났다. 닷새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장사익씨의 10주년 기념 무대는 지난 10월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루 두 차례 공연으로 치러졌다. 그 날 대기실은 진풍경이었다. 손을 맞잡은 중년 부부와 노인 들로 로비가 빼곡히 들어찬 것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채로웠다. 그는 그런 관객들에 부응했다. 1,2부 무대가 끝난 뒤 두루마기를 벗어버리고 나와서는 ‘3부는 나이트로 모시겠다’며 트롯과 블루스를 나긋나긋하게 불러제꼈다. 그가 “사모님, 가정을 버리시죠”라고 작업 멘트를 날리자 객석에서 한 아주머니가 ‘옵빠’를 외치며 자지러지기도 했다.

장사익씨는 “우리 10년 동안 열심히 살고, 10년 뒤 이 무대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관객과 손가락을 걸었다. 공연이 끝난 뒤 ‘아들래미가 표를 사줘서’ 왔다는 한 칠순 할머니는 “표값이 4만원이나 해도 하나도 안 아까워. 진짜 잘하지?”라며 기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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