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도 ‘간첩’도 시대의 피해자였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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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으로 재조명한 ‘남매간첩단’ 사건
흔히 비인간적인 상황은 가해자도 피해자로 만든다. 황철민 감독의 극영화 <프락치>는 11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남매간첩단’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존 인물 배인오씨(본명 백흥용)를 모델로 삼았다. 사건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쪽에서 들여다본 것이다.

당시 남매간첩단이라고 불린 인물이 바로 김삼석·김은주 남매. 얼마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다가 일부 언론의 도마에 올랐던 ‘간첩 출신 조사관’이 바로 김은주씨의 오빠인 김삼석씨이다.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현실’이라는 틀로 재조명되면서 사건 발생 11년 만에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이다.

지난 11월10일 국회에서 열린 <프락치> 시사회에 김삼석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를 만든 황철민 감독과, 11년 전 베를린으로 날아가 프락치 배인오씨의 양심 선언 과정을 지켜보았던 이덕우·이기욱 변호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가장 감회가 각별한 인물은 역시 김삼석씨였다. 황감독은 “피해자인 김삼석씨로서는 가해자의 처지를 주로 그린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라고 입을 뗐다.

김삼석씨는 “그 사람도 피해자다. 다만, 지난 여름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에 의해 치도곤을 당한 터라 착잡하다. 국가보안법이 철폐된 상황에서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라고 복잡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는 지난 8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조선일보 김대중씨, 그리고 서정갑 예비역대령연합회장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고소인 조사를 마쳤다.

남매간첩단 사건은 1993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여동생 김은주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운동가의 부탁을 받고 한 일본인으로부터 서류 봉투를 넘겨받다가 안기부 직원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봉투 안에는 <김일성> 원전을 비롯해 국가보안법상 문제가 될 수 있는 책자들이 들어 있었다. 그 전에 김삼석씨도 같은 인물에 의해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든 문제의 인물이 바로 배인오씨. 영화 <프락치>의 모델이다.

공안 당국에 의해 남매간첩단으로 발표된 김삼석·김은주 남매는 함정 수사와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맞섰으나 모두 묵살당했고, 이듬해인 1994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확정 판결이 난 지 사흘 만에 베를린에서 배인오씨가 “내가 그 사건의 프락치였다”라는 내용으로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배씨는 안전기획부 담당 과장과의 만남을 찍은 비디오와 대화 내용까지 증거물로 공개했다. 하지만 이미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후여서 재판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다큐 <남매와 진달래>도 같은 사건 다뤄

동생 김은주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김삼석씨는 이후 4년 동안 고스란히 실형을 살다가 1999년 만기 출소 뒤 복권되었다. 당시 상황과 이후의 삶은 최근 완성된 또 한편의 다큐멘터리 <남매와 진달래>(김진열 연출, 푸른영상 제작. 13분)에 담겨 있다. 이 영화에는 안기부 과장과의 만남 등 문제의 장면을 비롯해, 남매의 최근 인터뷰가 실려 있다. 황철민 감독의 극영화 <프락치>와 김진열 감독의 다큐멘터리 <남매와 진달래>를 함께 보면 사건의 전모를 짜맞출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양심선언을 했던 프락치 배인오씨는 계속 독일에 거주하다가 1997년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년 전 사건을 소재로 <프락치>를 만든 황철민 감독은, 베를린에서 직접 배인오씨를 만난 경험을 살려 영화를 기획했다. 당시 황감독은 베를린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영화학도였고, 그 덕에 남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감독은 “배씨가 안기부 일을 도왔다는 양심선언의 증거물이 된 비디오를 복사한 것이 바로 나다”라고 밝혔다.

그 테이프를 건네받아 국내로 들여온 이덕우 변호사는, 시사회장에서 황감독의 말을 듣고 ‘그런 사연이 숨겨져 있었느냐’며 놀랐다. 이변호사 또한 양심선언이 독일에서 있었던 만큼 국내에 사정이 자세히 알려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해, 증거물인 비디오 테이프를 밀반입하는 작전을 직접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변호사는 “외국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에게 내용을 말하지 않은 채 우편 송달을 부탁했다. 다행히 우리가 탄 독일발 비행기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리고 국내 기자회견 준비를 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대한변호사협회까지 나서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등 한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감독에 따르면, 배인오씨는 양심선언 이후에도 그쪽 한국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 채 살다가 급기야 월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중 프락치 혐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감독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점, 범청학련을 찾아와서도 본인 신분을 밝히지 않고 증거 테이프 내용도 밝히지 않은 채 며칠만 보관해달라고 부탁한 것 등 여러 가지를 볼 때 그의 행위가 ‘다목적’이라는 의구심을 현지 한인들이 품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를 품어주며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도 미심쩍은 행동을 접하면서 점차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테이프도, 범청학련측이 그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본인 허락 없이 틀어보고서야 내용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황감독은 “김삼석 남매 체포 이후 <말>지가 이 사건이 ‘프락치에 의한 조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던 것을 누군가 기억해냈다. 찾아온 사람이 혹시 그 사람 아닐까 의혹을 갖고 테이프를 틀어 보았다. 그 결과 그냥 돌려줄 물건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고, 복사 작업을 내가 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감독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도록 몰고간 것이 당시 상황의 비극’이라며 ‘어느 쪽으로부터도 신뢰를 얻지 못한 그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화에는 그런 문제 의식이 묻어난다. 황감독은 “국가보안법 논의가 제자리걸음인 것이 안타깝다. 가해자인 프락치 또한 부조리한 현실의 피해자라는 점을 부각해, 그 현실을 바꾸는 데 일조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영화 <프락치>는 국회 시사를 시작으로, 전국 릴레이 상영에 들어간다.

cinegut@yahoo.co.kr로 연락하면 단체 관람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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