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되로 주고 말로 받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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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계, 판권 구입→역수출 등으로 ‘떼돈’ 벌어…콘텐츠 활용 급증
올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에 빛나는 영화 <올드 보이>가 일본에서 개봉되어 화제다. <올드 보이>는 같은 이름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 제작사는 2만 달러에 만화 판권을 구입해 2백만 달러를 받고 일본에 영화 판권을 넘겼다. 원작 만화의 스토리 작가인 스치야 가론 씨는 영화에 대해 “원작 만화를 박찬욱 감독이 훌륭한 오락 영화로 만들었다. 대담한 구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금의환향한 <올드 보이>에 대한 일본의 시기와 질투도 없지 않았다. 한 일본 언론은 ‘한국이 우리 만화를 수입해 영화로 만들어서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이를 다시 역수출해 수백만 달러 개런티를 받는 동안 일본의 영화인들은 무엇을 했나’라고 분개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역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영화다.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의 판권을 구입해 제작한 이 영화는 2백70만 달러에 되팔렸다. <올드 보이>와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성공하자 요즘 한국 영화 제작자들은 일본 만화나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의 판권을 경쟁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일본 대중 문화 콘텐츠를 리메이크하는 현상은 영화계 밖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국립창극단이 국립극장 재개관작으로 공연한 창극 <제비>는 일본 와라비좌의 같은 제목 뮤지컬을 각색한 작품이다. 국립극장측은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조선의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삼각 러브 스토리를 다룬 이 작품이 ‘평화와 상생’이라는 국립극장의 이념에 맞다고 판단해 재개관작으로 결정했다.

<제비>의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결정한 사람은 김명곤 국립극장장이었다. 김극장장은 일본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2002 한·일 월드컵 기념 공연으로 제작된 뮤지컬 <제비>를 관람하게 되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일 관계를 쿨하게 접근한 <제비>는 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우리 악기 우리 춤 우리 소리가 조악한 수준으로 공연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칫 한국 전통 예술이 수준 낮은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김극장장은 리메이크를 결심했다. 귀국 후 그는 곧바로 이윤택(연출) 안숙선(작창) 원 일(작곡) 박종선(수성음악구성) 하용부(안무) 정공철(제주굿) 이광수(판굿) 등으로 구성된 드림팀을 꾸렸다. 창극 현대화가 다급했던 국립창극단도 흔쾌히 동참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립 박수를 받은 <제비>는 현재 국내 재공연과 함께 독일 초청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게임 영역에서는 리메이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일본을 활용하고 있다. 일본과 합작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게임의 ‘원 소스 멀티 유즈’를 꾀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하청 기지였던 한국이 온라인 게임이 성장하면서 일본에 애니메이션을 주문 생산하는 위치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 <포트리스2 블루>를 제작한 CCR(대표 윤석호)가 이같은 한·일 합작 원 소스 멀티 유즈 모형을 처음 개발했다.

<포트리스2 블루>를 원작으로 한 52부작 애니메이션 <포트리스>는 CCR를 비롯해 한·일 7개 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제작한 작품이다. 순수 제작비만 약 70억원이 든 <포트리스>의 제작비는 한국측이 64%, 일본측이 36%를 부담했다. 2003년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일본에서 방영된 <포트리스>는 국내에도 2003년 8월부터 올해 6월까지 방영되었는데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5%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성공하자 <포트리스2 블루>는 캐릭터 상품 판매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3백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5백억원대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이같은 도약은 국산 캐릭터의 신화로 남아있는 둘리의 매출을 뛰어넘는 것으로, 게임 업계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최고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다.

<포트리스2 블루>, 캐릭터 매출 5백억원 예상

온라인 게임 <라그나로크> 역시 한·일 합작으로 26부작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라그나로크 디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상승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매주 수요일 방영되어 지난 9월 종영된 <라그나로크 디 애니메이션>은 한때 일본의 대표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공각기동대>의 시청률을 뛰어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그나로크 디 애니메이션>을 방영한 TV도쿄의 한 관계자는 “쟁쟁한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치열하게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시리즈 첫 작품이 시청률 상위권을 유지한 것은 대단한 성과다”라고 평가했다. <라그나로크 디 애니메이션>은 현재 필리핀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앞으로 더 많은 나라에서 방영될 것으로 보인다. <라그나로크> 제작사인 그라비티(대표 김현국)는 <라그나로크 디 애니메이션>이 해외 시장 개척의 첨병이 될 것으로 보고 속편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라그나로크 디 애니메이션>이 성공함으로써 <라그나로크>는 일본 진출에 탄력을 받았다. 지난 6월에는 게임 동시 접속자 수가 사상 최고치인 10만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특히 관련 캐릭터 상품이 봇물을 이루었는데, 코믹스 팬아트북 등 열네 가지 출판물과 70여 가지의 캐릭터 상품이 출시되었다.

오는 11월26일, 한·일 동시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신암행어사>는 ‘用日論(용일론)’의 절정을 보여준다. <신암행어사>의 원작자인 윤인완씨(스토리 작가)와 양경일씨(작화)는 일찍부터 만화 종주국인 일본에 진출해 선동렬 선수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이룬 것만큼이나 큰 성취를 이루었다.

<신암행어사>는 암행어사 박문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춘향전> 등 한국 고전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출판사인 쇼가쿠간(小學館) 사가 출판한 <신암행어사>는 지금까지 여덟 권이 출시되어 약 2백만부가 팔려나갔다. 현재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등 유럽 시장과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시장 진출에 성공한 <신암행어사>는 중국과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출판 만화의 성공에 고무된 쇼가쿠간 사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결정했다. <신암행어사>의 한국판 출판을 맡았던 대원씨앤에이홀딩스를 비롯한 한국측 4개 사와 쇼가쿠간 사를 비롯한 일본측 9개 사가 제작위원회에 참여했다. 순제작비가 25억원 정도 소요된 <신암행어사>의 주제가는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가수 보아가 불렀다.
한국 대중 문화는 일본을 넘어섰다

흥행을 겨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극장용 애니메이션 <신암행어사>는 서점용 만화 판매를 위한 프로모션의 성격이 강하다. <신암행어사>가 원작에 충실한 것도 이 때문인데, 영화 개봉 이후 한·일 양국에서 만화 판매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신암행어사> 관련 캐릭터 상품 판매도 영화가 개봉됨으로써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일본의 대중 문화 콘텐츠와 콘텐츠 제작 능력을 활용하고 있다. 인기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 콘서트>에서는 일본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이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춤추는 대수사선>을 패러디한 코너로 시청자들의 웃음보를 자극하고 있다.

가요계에서는 한·일 공동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씨는 소속 그룹 ‘더 트랙스’를 일본에 진출시키기 위해 일본의 전설적인 록그룹 ‘엑스 재팬’의 리더였던 요시키를 프로듀서로 참가시켰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알려진 요시키는 흔쾌히 ‘더 트랙스’의 일본 발매 음반 프로듀싱을 맡았다.

한국의 대중 문화 산업 종사자들이 일본의 대중 문화 콘텐츠를 리메이크하고 일본의 대중 문화 콘텐츠 제작 역량을 활용하듯이, 일본의 대중 문화 콘텐츠 제작자들도 한국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겨울연가>이다. 소설 <겨울연가>와 만화 <겨울연가>가 텔레비전 드라마 못지 않은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이사오 사사키는 피아니스트 이루마씨와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한·일 양국에서 뉴에이지 음악팬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일본의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헌정 음악을 연주해 한국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재일동포 작곡가 양방언씨는 푸리와 같은 퓨전 국악밴드와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10여 년 전, 일본 대중 문화가 아시아를 지배할 때 일본의 문화 평론가들은 ‘탈아론(脫亞論)’으로 이를 설명했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아시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시아 대중 문화의 지형도는 바뀌었다. 일본을 따라 했던 한국이 이제 일본을 뛰어넘고 있다. 마치 유럽 문화를 원형으로 이를 미국화해 세계 대중 문화의 패자가 된 미국처럼 한국도 일본 대중 문화를 수입해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 대중 문화의 맹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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