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불평등'도 대물림된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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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개발원 ‘문화 격차’ 실태 발표…수요자 중심으로 지원책 전환해야
‘문화예술인 연봉 1천만원 이하 수두룩’. 잊을 만하면 이런 제목의 기사가 지면을 탄다. 예술가가 얼마나 배가 고픈 직업인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 이처럼 지금까지 문화에 관한 논의는, 표현의 자유 혹은 예술가들의 가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최근 서울시정개발원이 예술 주체들의 문화 자유권만큼 문화 향수권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서울시정개발원 조권중 연구위원은 서울시민 1천3백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뒤 소득별, 교육수준별 문화 격차 실태에 관한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수요자 중심의 문화 향수권 개념을 적극 도입했다.

실태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학력이 높고 소득이 높을수록 여행이나 스포츠, 문화 행사에 적극 참여했고, 반대 경우 텔레비전을 보면서 집 안에서 쉬는 ‘방콕’ 족이 많았다.

걱정스러운 대목도 새삼 확인되었다. 부모가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낮을수록 자녀에게 문화맹 현상이 세습될 확률이 높다는 것. 조연구원은 “정보 격차에 대해서는 많은 대책이 나왔으나 문화 격차나 불평등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은 潔璿求? 문화 교육까지 (공교육이 아닌) 시장에 맡겨지면서 부모의 사적 투자에 의한 문화 자본 세습이 가속화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서울시민 26%, 평생 공연장 한 번도 안찾아

설문 조사 결과 즐기는 삶에 대한 욕구 자체는 큰 것으로 드러났다. ‘직장을 구할 때 연봉보다는 여가 시간이 중요하다’고 답한 응답자가 70%에 육박했고, ‘남들처럼 문화를 즐기지 못하면 남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람이 많았다(53%).

하지만 정작 실태는 어떨까. 상대적으로 문화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높은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26%는 평생 단 한 차례도 전통 예술·연극·오페라·무용 공연장이나 미술 전시회 등을 찾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이라도 공연장이나 전시관을 찾은 사람은 44%였다. 저소득층의 경우 100만원 이하는 66%, 100만~3백만 원은 63%가 1년 동안 공연장이나 전시장을 한 번도 찾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관람 후 만족도도 시원치 않았다. 만족스러운 행사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절반 이상(54%)이 ‘없었다’고 답해, 어렵사리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악순환이 염려되는 대목이다. 이렇게 시큰둥한 반응은 소득이 낮을수록, 그리고 초대권 등을 활용해 작품을 본 경우 더 심했다.

이는 장르 치우침 현상의 이면이기도 하다. 이른바 문화 생활이 공연이나 현장을 찾아가기보다는 미디어 문화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다. 문화 지출 항목 가운데 그나마 영화·책(잡지)·음반과 비디오 대여 비율은 높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장르이든 문화비를 따로 지출하지 않는다’는 응답자가 서울시민의 3분의 1에 달했다. 특히 생산직·영업직·주부의 경우 ‘문화비 지출이 없다’는 응답자가 50%를 넘어섰다.

흥미로운 것은 문화 향수에서는 소득(경제 자본)보다 학력(문화 자본)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 손에 이끌려 문화 활동에 노출됨으로써 문화 해득력을 쌓을 기회를 가질 경우, 이후 본인의 소득이 어떻든 그런 문화에 친숙해질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준다.

나이가 어릴수록 ‘남들만큼 문화 생활을 하지 못하면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비율이 높았다. 이런 차이는 18세 이전에 예술 교육을 받은 경험을 놓고 볼 때 2035세대가 25%를 넘어가는 반면, 386세대는 10%, 그 외 기성 세대는 6% 수준에 머무른 것과 연관이 있다.

이번 연구는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했지만, 지역간 격차도 몹시 크다. 지난 10월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실이 밝힌 바에 따르면, 티켓 보조금제도인 ‘사랑 티켓’의 경우 문화관광부 지원 예산 22억원 가운데 70%가 서울시에 집중 지원되었고, 강원도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시정개발원은 “지금까지는 주로 예술가를 지원함으로써 양질의 문화를 공급하려고 노력했다면 이제 시민들의 욕구를 중심으로, 수요자 중심으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한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문화 접대와 문화비 소득 공제 제도는 뜻은 좋으나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다.
문화 접대는, 판공비 실명제 도입 이후 기업체로부터 호응이 높은 제도이다. 기업체가 공연 티켓을 사서 접대할 경우, 전체 규모가 얼마이든 개인당 제공액이 50만원 이하일 경우 내역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혜층이 누가 될까 짚어보면, 그런 경로가 아니어도 돈 내고 공연을 볼 수 있는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화 향수권 확대와는 거리가 있다. 일반 수요자보다는 기업과 예술 공급자(문화계)를 지원하는 제도라는 성격이 짙은 것이다.

10년 넘게 논란만 거듭하고 있는 문화비 소득 공제 제도는 관련 부처가 손발을 맞추지 못해 입법이 미루어지고 있는 경우다. 재경부 논리가 흥미롭다. 문화비를 교육비나 양육비처럼 공제할 경우, 세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특정 계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역시 고소득자가 문화비 지출이 많은 만큼 특정 계층용이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그런 측면은 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논리로 쓰이기보다는 다른 방향의 지원책이 더 필요하다고 해석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차별 없는 문화 교육의 필요성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행사장을 찾는 성인의 15%가 자녀 교육 때문이라고 답한 것에 비추어도 그렇다. 이런 욕구를 반영해서인지 최근 소외층 자녀에 대한 지원책을 민과 관이 함께 강구하는 예가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메세나협의회와 문화관광부가 손잡은 문화나눔 프로그램. 보육원 원아들을 대상으로 예술 교육 기회를 늘리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호응이 좋아, 최근 공부방까지 대상을 확대했다. 얼마 전 서울 삼청각에서 공연된 국악 뮤지컬 <솟아라 도깨비>를 관람한 도림공부방 간사 양혜직씨는 “아이들을 인솔해 현장에 가는 게 걱정이었는데, 교통편과 간식까지 제공해 무척 유익했다. 국악 뮤지컬에 빠져드는 아이들을 보고 놀랐다”라고 소감을 밝혔다(이용신청 www.happyar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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