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서 아름다운 섬 풍경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복 지음 <오름 오르다>/사진으로 읽는 제주 기행
 
제주도 출신 소설가를 선배로 둔 덕에 ‘그 섬’ 출입이 잦은 편이다. 서울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모여 막걸리 마시다가도 문득 회가 동하면 ‘모월모시에 제주시 남문통 중앙성당 건너편 몽당연필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면 그것으로 만사 OK이다. 부랴부랴 제각각 비행기 타고 가서 그곳 토박이 글쟁이들과 어울려 거나하게 한잔 마시고는 아무 데나 쓰러져서 잔다.

다음날 아침에는 부둣가 근처 식당에서 갈칫국이나 멜국(멸치국) 한 사발로 쓰린 속을 달래고, 차 한 대 대절해서 한라산 근처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오름’으로 향한다. 거기, 그 둥근 산자락(언덕) 풀밭에 등 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정취는, 말 그대로 ‘일러 무삼하리요’다. 휴대전화가 막 유행할 때는 그 산 꼭대기에서 서울로 전화 걸어 못온 사람 약 올리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문청’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사숙했을 이성복 시인이 산문집 <오름 오르다> (현대문학 펴냄)를 상재했다. 롤랑 바르트(<카메라 루시다>), 알베르 카뮈(<태양의 후예)>, 미셸 트루니에(<뒷모습>)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내심 부러워했는데, 우리도 이제야 기품 있는 사진 에세이 한 권을 가지게 된 것 같아 반갑다. 누구나 목도하는 현실 속의 오름이 아니라 사진작가 고남수의 앵글에 담긴 오름 풍경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은 점이 이색적이다. 오름은, 이성복 시인에게 풍경이라기보다는 정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대체로 거무튀튀한 고남수의 무미건조한 오름 사진에서 그토록 곡절 많고 사연 굽이치는 ‘존재의 슬픔’을 길어내는 것을 보면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오름의 둥금에는 고전주의적 과묵함이 있다”


예컨대, 오름에 대한 첫인상을 ‘둥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그 둥금에는 ‘얇다란 종잇장처럼 손가락을 베이게 만드는 금’과 ‘아귀를 굳게 다문 피조개나 대합조개의 고전주의적인 과묵함이 있다’고 시인이 말할 때 독자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오름을 여인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에게 오름의 ‘구비진 능선은 한껏 가랑이를 벌린 여인’으로, ‘봉긋한 배와 처진 가슴을 드러내놓고 잠자는 중년 여인’으로, ‘부푼 배와 젖가슴 사이로 끼어드는 검은 나무 행렬’로 비치며, ‘부드럽고 느린 지느러미를 해묵은 슬픔처럼 늘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오름으로 오르는 외줄기 하얀 길에서는 ‘차안과 피안’을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구획과 분리’의 습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외줄기 하얀 길의 차안과 피안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개념이라며, ‘검은 하늘 밑의 그 흰빛 길’에서 ‘잿빛에 맞서 생명의 눈부심을 지켜내는 안간힘’의 은유를 읽어낸다. 길이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기보다는 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가령 다음과 같은 시인의 성찰은 절실하게 다가온다.

‘흰 분필로 그어놓은 듯한 하얀 길이 있다. 그 가느다란 길의 흰빛은 너무도 강해서 높고낮은 오름들은 저마다 그 길을 향해 모여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손가락으로 물을 가르면 금세 달려들어 아물어붙듯이, 강제로 분리된 양쪽의 풍경들은 서로에게 가 닿으려고 순식간에 몰려드는 것이다. 하지만 길이 만들어놓은 상처는 너무나 깊어서 양쪽의 풍경은 끝내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 합쳐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합침을 고대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양쪽의 풍경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분리가 먼저 있고,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비록 제주의 오름을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는 이라도 ‘순간적인 숨음과 사라짐을 통해 자신과 주위 풍경들에게 숨쉴 수 있고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오름의 길은 연말 연시의 부박함을 견디는 ‘작은 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책 한 권이 까맣게 잊고 있던 욕망을 부추긴다. <오름 오르다>를 읽으며 무작정, 아무 대책 없이 제주도로 떠나 그 너른 풀밭에 뒹굴고 싶은 생각 간절해진다. 명색이 ‘사진 에세이’인데 사진 인쇄 상태가 썩 보기 좋지는 않아 실망스러운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