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로 혁명하며 땅 갈았던 참 농사꾼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문학) ()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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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전우익씨/“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1991년 여름에 전우익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해 봄 중국 작가 루쉰(魯迅)의 산문들을 모아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책을 내고, 그 책이 장안에서 제법 회자되던 무렵, 엽서가 한 장 왔다. 전우익 선생이 보낸 것이었다. 당시 나는 새파란 박사과정 학생이었고, 그때까지 전우익 선생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일제 시대를 거쳐 온 어르신 가운데 간혹 루쉰에 매혹되어 거의 루쉰 마니아 수준에서 루쉰을 읽어 온 지식인들이 꽤나 있기에 그런 분 가운데 한 분이겠거니 지레짐작했다.

첫인상은, 방금 전까지 논에서 피를 뽑다가 온 듯한 시골 노인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원래 완행 열차가 값이 더 비싸야 합니다. 천천히 달리면서 온 풍경을 다 볼 수 있으니 당연히 더 비싸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면서 농사 이야기, 나무 이야기, 루쉰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 속에 쏙쏙 박히고, 듣는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그야말로 어록 수준이었다.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참으로 다정다감하게, 무엇보다도 쉽고 소박하게 하시는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참으로 깊고도 긴 파문을 일으키면서 내 생각과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사상적 피로감의 새로운 돌파구”

당시 나로서는 일종의 사상적 피로감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루쉰 공부도 그 일환이었다. 전우익 선생 말대로 ‘그럴싸한 이론을 줄줄 외우고 민중, 민중 하지만 행동이나 삶이 말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회의만 자주 하고 논쟁만 일삼는 사람’들에게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역사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깊지 못한 채 사람들과 더불어 집을 지을 줄 모르던 나와 나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한창 절망감을 느끼던 무렵에 전우익 선생을 만났기에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전우익 선생은 당신의 삶 자체로 혁명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뒤 가끔 서울에 오실 때면 당신이 가지고 있던 귀한 루쉰 자료를 건네주기도 하고 가끔 밥도 사주셨다. 선생을 만날 때 무엇보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는 일과 루쉰을 하나로 연결하는 당신의 삶과 사고였다. 그것은 루쉰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고, 농사를 지으며 땅의 원리, 물의 원리, 나무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과 루쉰을 읽으며 현실과 역사의 원리를 읽는 것이 당신의 생각과 삶 속에서 제대로 곰삭아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전우익 선생이 지녔던 여느 생태주의자나 진보주의자들과 구분되는 독특함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당신은 물이 흐르듯이 역사가 흘러야 된다고 생각하였고, 자연의 흐름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역사의 흐름도 막으려 들고 민심도 깔아뭉개려 드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자연에 따라 사는 일과 역사를 제대로 만드는 일이 하나였고 자연과 올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 역사나 인간과 올바로 관계를 맺는 일이었던 것이다.

전우익 선생이 몇년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 선생을 생태주의자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선생은 유기농 차원이나 자연을 절대 숭배하는 차원의 생태주의자는 아니었다. 굳이 생태주의자라고 한다면 자연의 원리 속에서 역사의 원리를 보고, 자연의 흐름에 역사를 조응시키려는 차원의 생태주의였다. 선생은 땅을 가는 농사꾼이자 역사를 가는 농사꾼, 참 농사꾼이었다.

루쉰은 사람을 바로 세우는 일이 근본이라고 했다. 전우익 선생에게도 문제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나고 크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근본이라고 믿는다. 근본이 바뀌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없고, 새로운 사람들의 집단적 탄생 없이는 세상은 바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당신이었지만 그래도 희망은 나이 든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나무도 나이 든 큰 나무를 가꾸는 것보다는 어린 묘목을 심어야 나무가 잘 산다는, 나무를 키우면서 터득한 이치를 나 같은 젊은 사람 키우는 일로 실천하신 것이다. 내가 받았던 과분한 관심과 격려도 실은 젊고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젊은 사람들은 옛 사람들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 땅 젊은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바람의 일환이었으리라.

“씨앗은 마음에 심으라”

나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면 선생은 늘 조심하시고 세심하셨다. 아주 작고 작은 일에도 서로 부담감을 주지 않고 소리 없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는 평소 당신의 지론을 넉넉하게 보여주었고, 늘 내 형편을 헤아려 주며 내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내가 편하도록 배려해 주시곤 하였다. 봉화에서 엽서로, 마포나 인사동에서 전화로 안부를 물으시는 것도 늘 선생이 먼저였다. 나는 선생이 쓰러지신 뒤 병원에 계실 때도 그저 안부 전화 한 통 한 것이 전부다.

전우익 선생은 “씨앗은 작아서 땅에 뿌리기도 쉽고 땅에도 별로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라면서 모름지기 씨앗은 “그 사람 마음 속에 심어졌는지도 모르게 심어져서 그 사람이 싹틔워 키우고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인간의 땅에 인간해방 사상도, 사람에게 사람도 그런 씨앗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우익 선생은 나에게, 선생과 교유했던 여러 젊은이들의 삶에 그런 씨앗이다. 그리곤 가셨다. 이 엄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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