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 찬란한 <영웅시대>
  •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
  • 승인 2005.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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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도 사건도 없이 에피소드만 나열…‘가난=악’ 메시지 전달에 주력
지난 6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문화방송의 드라마 <영웅시대>를 흥미있게 보고 있다.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비판하기 위해서.

첫 방송이 나가기 전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던 <영웅시대>는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호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재벌 미화 논쟁’ ‘역사 왜곡 논쟁’을 일으킨 <영웅시대>는 차기 대권 주자 가운데 한 명인 현역 정치인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성한 뒷말을 낳았다.

재벌·독재자 미화할 능력도 없는 드라마

그러나 주인공들의 성장기와 청년기를 거쳐, 이야기가 본격적인 경제 개발 시대로 접어든 이즈음에 이르러 되짚어 보면, 드라마 도입부에서 쏟아져 나왔던 이런 진지한 비판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기우였던가 싶어진다. 이 드라마가 재벌을 미화하려 들거나 정경 유착으로 점철된 군사 독재의 역사를 왜곡하려 들지 않고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가 워낙 형편없어서 설사 재벌을 미화하고 독재자를 옹호하려는 의지가 충만하다 해도 그럴 능력이 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우선 사실 관계와 일치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제법 그럴싸하게 전개되었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넘어와서는 도무지 현실성 있는 인물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아주 희한한 드라마가 되어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고 해도 도저히 썰렁해서 못 보아줄 유치한 수준의 대사와 행동 들이 아무 맥락 없이 화면을 가득 메울 뿐, 살아 움직이는 인물의 언행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이 드라마는 도입부에서 극중 인물인 천사국의 입을 빌려 “세기(현대그룹을 모델로 한 극중 기업)를 모르면 한국 경제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한국을 대표한다는 기업을 ‘경제 개발’의 주역으로 치켜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희화화해 조롱하겠다는 풍자 드라마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나라 꼴이 우스웠던 시절이라고는 해도, 당시로서는 여러 면에서 가장 수준 높은 엘리트 집단 중의 하나였던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려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던 주역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어리숙하다.

그것은 현대가(家)를 모델로 했다는 천태산 일가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삼성가를 모델로 했다는 국대호 주변의 인물들이 비교적 ‘사람 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에피소드만 줄줄이 나열되는 평면적인 스토리 전개에 따라 이들도 큰 비중을 갖지 못해 ‘드라마의 코미디화’라는 대세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요컨대 이 드라마에는 연극의 3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이 없으니 변변한 ‘사건’이 있을 리 없고, 그래서 어차피 역사적 사실로 주어져 있는 앙상한 ‘배경’ 속에서 어설픈 에피소드만 맥락도 없이 나열될 뿐이다. 월남 파병이니 한·일 회담이니 하는 역사적 에피소드들은 무수히 동원되지만, 왜 그 장면에서 그 사건이 전개되는지 아무런 극적 필연성을 찾을 수가 없다. <영웅시대>라는데 영웅이 없다. 영웅이 없으니, 영웅을 칭찬도 비난도 할 수 없다.

행위의 일관성이라곤 전혀 없이 우스꽝스럽기만 한 인물들이 썰렁한 농담 수준도 안되는 유치한 대사들이나 늘어놓으며 신파조의 어릿광대 놀음이나 하고 있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전혀 맹물이라고 말하기는 이르다. 이 드라마, 아니 개그가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보이며 집요하게 되풀이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난은 악’이라는 메시지다. 그냥 ‘악’이 아니라 ‘절대 악’이다. 따라서 ‘돈을 버는 것’은 ‘절대 선’이다. 다른 어떤 가치도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을 이 드라마에서는 거창하게 ‘경제’라고 호명한다. 그런데 이 대목이 바로 이 드라마의 가장 심각한 코미디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경제 활동’은 ‘가계 경제’ 수준에서나 가능한 모델이다. 아니 실은 가계 경제에서조차도 현실성이 의심되는 모델이다.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상식적인 사람들과 달리 드라마 주인공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산다. 가계 경제 수준에서는 그런 도착을 보이는 사람이 드문데, 이 드라마에서는 넘쳐난다.

워낙 궁핍한 시대가 배경이니, 왜 돈을 버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돈을 벌기 위해 사는 인간 군상을 그린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또 있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경제는 가계 경제가 아니라, 이미 업계 정상을 달리고 있는 기업을 다룬 기업 경제이며, 또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고 역설하곤 하는 군사 정권을 다룬 국민 경제이다.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산다’고 우기고…

매우 거칠게 단순화하더라도 기업 경제는 ‘돈이 될 만한 일’에 ‘돈을 쓰는 일’(투자)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물며 국민 경제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경제 개발의 주역이라는 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돈을 어디에 쓰는가(투자하는가), 또는 어딘가에 쓴다면 왜 거기에 써야만 하는가를 고민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이미 ‘고도 성장’이라는,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과가 가능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차라리 그 과정을 ‘미화’라도 해야 ‘비판’이라도 할 텐데, 이 드라마는 그 미화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기업가도 가부장이고, 대통령도 가부장일 뿐이다. 그럴 바에야 거창하게 ‘경제’를 들먹일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결국 경제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드라마가 빠진 함정이다. <영웅시대>는 경제에 대한 관념을 매우 편협하게 축소·왜곡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고,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는 그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경제 문제’라는 진실을 망각하도록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초호화 캐스팅과 블록버스터급 제작비를 들인 경제 드라마의 교훈이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산다’는 것이라니, 정말 비경제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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