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간척 사업도 일제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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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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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건평 의혹’에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어떤 관계일까. 전세계 나이키 신발의 20%를 하청받아 생산하고 있는 박회장은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가지고 있고, 올 1월에는 ‘베트남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한국인’으로 뽑혀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부산·경남 일대의 막후 실력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노건평씨와 관련한 의혹을 꼼꼼히 뜯어보다 보면, 아직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박회장이 노대통령 쪽과 무언가 남다른 관계라는 정황이 여러 가지 보인다. 박회장은 2002년 4월10일, 노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갖고 있던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주택 2채와 땅 11필지(1천8백평)를 5억원에 매입했다. 노대통령이 여당인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이 확실해 보일 때였다. 그는 “그 땅이 민씨(건평씨 처남) 명의로 되어 있어 건평씨 땅인 줄 몰랐다”라고 말한다. 전망이 좋아서 해외에 운영하는 나이키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연수원을 지으려고 땅을 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78년부터 건평씨를 알고 지냈다는 그가, 더구나 건평씨가 태광실업 전무에게 땅을 사달라고 요청해 매매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말로 그 땅의 주인이 건평씨였다는 사실을 몰랐는지 의문이다. 두 사람이 5억원대 거래를 하면서 매매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도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 관행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박회장은 노대통령에게는 단 1원도 준 적이 없다며 노대통령과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은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보좌역을 지냈고 지금은 한나라당 상임위원으로 있는 등 한나라당과 훨씬 가깝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5월24일 부산에서 열린 박회장 둘째 딸 결혼식에는 한나라당 소속인 김혁규 경남도지사와 김영일·도종이 의원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박회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재계 일각에서는 그가 지난 대선 때 노대통령을 적극 후원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 정부 고위직을 지낸 ㅎ씨와 ㄱ씨 등 영향력 있는 부산·경남 인사 5명이 모임을 만들어 노대통령을 도왔는데, 박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박회장의 셋째 딸이 청와대 국정상황실 8급 직원으로 근무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박회장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절친하다는 것도 주목된다. 이회장은 최근 노대통령과 ‘밀월’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재계의 한 소식통은 이건희-박연차-노무현 3자 사이에 어떤 연결 사슬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른바 ‘박연차 의혹’은 쉽게 밝혀질 것 같지 않다. 그에 대해 알 만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심지어 박회장이 살고 있는 김해가 지역구인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이 “내가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라고 해명했을 정도이다.

박회장을 둘러싼 의혹은 당분간 잠복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그를 주목하는 눈이 많아졌다. 박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통 크게 베팅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그가 과연 사업에서만이 아니라 정치권에도 통 크게 베팅했는지 지켜볼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노건평씨는 그저 형이 아니었다. 친구이자 아버지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엉엉 울기만 하면 형은 언제든 내게 주었다”라고 말했다.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운 천재 동생을 뒷바라지하느라 형은 야간 고교에 진학했다. 그마저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다. 그래도 형은 독학으로 세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가장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어려운 형편에도 노대통령이 사법 시험에 매달려 합격할 수 있었던 데는 건평씨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금배지를 단 이후에도 건평씨의 자리는 변함이 없었다. 노대통령은 선거 때마다‘형님, 돈 없습니껴’라고 손을 벌렸다. 그때마다 건평씨는 ‘옛다, 가져 가그라’며 돈을 내주었다. 건평씨는 노대통령이 그렇게 허물 없이 의지한 형이었다. 이렇게 돈 거래를 한 탓에 건평씨는 노대통령 재산의 상당 부분을 관리하고 있다며 한나라당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노후보가 경남 김해 땅을 매입할 때 형 건평씨에게 2억8천만원을 빌려주어 사실상 부동산 투기를 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후보 쪽은 “국회의원이 된 뒤 재산등록 때 형 명의로 투자한 사실을 자진 신고했으며, 그 뒤 정치하는 과정에서 형으로부터 애초 투자금 이상 가져다 써 김해 땅은 실제로 형 소유가 됐다”라고 반박했다.

최근 김의원은 ‘건평씨와 진영 땅을 경락받은 민상철씨는 노대통령의 재산 대리인일 뿐’이라며 노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민상철씨는 건평씨의 둘째 처남으로, 경매 처분된 건평씨의 땅을 낙찰받았다. 건평씨는 평생에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동생이 정치가가 되어 꿈을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남이 의사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큰 소원을 이룬 건평씨는 대선 직후 “처남이 어려운 상황인데 여력이 없다. 누구에게 부탁하면 탈이 날 것 같아 도와줄 수도 없고…”라며 기자에게 은행 대출 절차를 묻기도 했다. 건평씨에게 민경찬씨(44)는 그저 처남이 아니었다. 건평씨의 부동산 의혹이 불거지자 건평씨가 그렇게 아끼는 첫째 처남 민경찬씨가 핵심 당사자로 떠올랐다. 그는 이름 난 의사다. 국내에 몇 안 되는 배상의학 전공자(박사)로서 탤런트 정애리씨와 함께 KBS 라디오 <라디오 간병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민씨는 인터넷 병원 ‘아파요닷컴’(www.apayo. com)을 운영하며 사이버 처방전을 발행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사이버 처방전 사업에 대해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민씨는 오는 7월1일 ‘아파요닷컴’을 다시 열 계획이다.

민경찬씨는 지난해 3월16일부터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에 ㅍ종합병원(2백3 병상)을 운영하고 있다. 건평씨의 남다른 총애와 재력을 갖춘 때문인지 민씨에게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지난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 병원에 노무현 대통령의 자금이 건평씨를 통해 들어갔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민씨는 “자형은 돕고 싶어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자형으로부터는 한푼도 받지 않았다”라고 펄쩍 뛰었다. 병원 개업은 순수하게 자신의 재력과 융자로 이룬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병원 개원 전인 재작년부터 누구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수사관들이 들아닥쳐 병원 자금원에 대해 이 잡듯이 뒤졌지만 아무런 흠이 없었다고 밝혔다(아래 인터뷰 참조). 민씨가 대선 이후 병원에 장례식장을 열었고, 병원 개업과 운영비로 은행권에서 80억원을 대출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민씨는 터무니없다는 반응이다. 민씨는 장례식장은 관할 관청에 신고만 하면 설치할 수 있는 시설물이지만 주민과 원만히 타협하기 위해 개원 후 1년 만에 열었다고 설명했다. 병원을 인수·운영하는 과정에서 대출받은 금액은 39억원으로, 병원의 실제 감정가 56억원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금융권에서 내주어 개인적으로 돈을 융통해야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대통령 친인척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씨는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민씨는 “병원 운영비는 스스로 해결해 가고 있으며, 의도가 불순한 투자는 절대 받지 않았다. 은행권에서 리스를 통해 새 의료 장비를 들여놓아야 하는데 특혜 의혹이 일까 봐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의도가 불순한 투자’에 대한 진위 여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병원이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지만 민경찬씨에 대한 소문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경영 압박을 받던 병원이 노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대규모 투자를 받아 숨통이 터졌다는 것과, 민씨가 다단계·벤처 사업가 등과 어울려 다니며 이들의 이권을 청탁하고 다닌다는 것이 소문의 핵심이다. 여기에 민씨가 병원 운영에는 관심이 없고 서울 세종로와 강남에서 지낸다는 둥, 청와대에서 민씨를 불러 주의를 주었다는 둥 또 다른 소문이 곁들여졌다.

병원은 현재 7층짜리 건물과 터가 채권자들에게 가압류되어 법원 경매에 넘겨진 상태다. 설비 대금은 물론 전기 요금마저 밀려 있는 것을 감안하면 소문은 상당 부분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민경찬씨는 “청탁 대가로 병원 투자금을 받았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 직접 알아보았더니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떠벌리고 다닌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어지간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고, 병원에 있어도 없다고 말하고 전화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 운영에 소홀하다는 소문이 나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실 고위 관계자가 민씨를 불러 주의를 준 것은 사실이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민원장이 다단계 회사 사장의 민원을 해결하고 다닌다고 해서 내용을 파악해 보았지만 별 의혹이 없었다. 민씨에게 주위에 안 좋은 소문이 도니 처신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이른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민씨도 이를 시인했다. 단순히 소문만으로 청와대가 움직인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아직 남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민경찬씨는 주위 사람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5년간 나는 없다”라고 말했다. 5년 간은 납작 엎드려 있는 듯 없는 듯 살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민씨는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한동안 의혹의 눈초리가 민씨와 병원 주위를 맴돌 공산이 크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기간은 36년에 불과하지만 그 독성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군대와 관청 그리고 학교에서까지도 제국주의의 망령은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더욱 기막힌 일은 원조인 일본은 이미 버렸거나 뜯어고친 악습을 우리만 끌어안고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규모 간척사업도 알고 보면 일제의 잔재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일본에 제국주의가 나타나기 전에는 수백 년 동안 환경친화적인 간척을 해왔다. 갯벌에 통나무를 박아 토사가 쌓여 제방 구실을 할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렸다가 배후지를 건조하는 방식이다. 한뼘의 갯벌이 새로 생겨야 비로소 한뼘의 농토를 넓혔기 때문에 갯벌이 말살될 염려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정이 변했다.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일제가 식량 증산을 위해 대규모 간척을 장려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습지네트워크 대표 야마시타 히로부미 씨(2000년 7월 타계) 같은 이는 2000년 5월 전주를 방문해 “아직도 일본의 매립 방식을 한국이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은 대규모 간척 방법을 네덜란드로부터 배웠다. 긴 방조제를 쌓고 그 안에 담수호를 조성하는 복식 간척인데, 우리 나라 새만금을 비롯한 대부분의 간척사업이 채택한 방식이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이 방식이 환경 재앙을 부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바닷물과 담수호의 물을 순환시키는 방식으로 전환한 지 오래다. 일본 역시 대규모 간척 계획을 축소하는 중이다. 새만금 간척 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3보1배 순례단이 두 달 넘게 3백㎞ 가까이 걸어 서울 여의도에서 결의대회를 가졌다. 사업 추진을 지지하는 세력과 물리적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러다가 네덜란드와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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