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개혁 면제' 증후군
  •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 승인 2001.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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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회계 장부를, 의사의 진료비 청구서를, 언론사의 세금 신고를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신뢰의 사회'를 만들려면 정치권이 먼저 철저한 자금세탁방지법을 제정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얼마 전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의장 제프리 존스 씨가 중요한 충고를 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가장 큰 이유는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할 지름길은 회계 장부를 조작한 책임자들을 시범 사례로 몇 명 감옥에 보내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곧 제대로 된 자금세탁방지법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정치자금을 조사 대상에 포함하고 금융정보원에 계좌추적권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은 온갖 꼼수를 써서 이를 회피하려는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여 왔다. 하도 여러 번 입장들이 바뀌어서 최종 결론이 어찌 될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대다수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분명하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개혁에 따르는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면서 이를 감내해 달라고 호소해 놓고, 자기들만은 개혁의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면 여론의 질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만이 치사하게 엄정한 법 적용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개혁파 국회의원들이 의사들의 부당한 진료비 청구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안을 제출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그런데 의사들의 압력을 받은 몇몇 의원이 중도 하차했다고 한다. 중도 하차한 의원들에게도 실망을 느끼지만 더욱 서글픈 것은 의사들이 처벌 강화를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떳떳하지 못한 의사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강력한 처벌 가능성을 줄여보겠다는 꼴사나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언론사 세무 조사 결과에 대한 이른바 '빅3'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다. 사회의 공기요 정의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언론사들이 치사하게 세금을 떼어먹은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반성과 사과는커녕 온갖 이유를 들어 세무 조사의 정당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가장 먼저 소리 높여 엄정한 법집행을 외치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이다.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위해서는 지도층이 솔선 수범해서 도덕적 권위를 획득해야 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높은 윤리 기준이 적용되고 더 엄중한 법의 적용이 있어야만 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것처럼 물질적 자본만을 축적하여 선진국이 되기는 어렵다. 사회적 신뢰는 선진국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인데, 사회적 신뢰는 법치주의와 공공 윤리를 토양으로 하여 자라나는 것이다.


법치주의와 공공 윤리 확립은 사회 발전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약하면 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초가 부실한 건물에 자꾸 하중을 더하면 삼풍백화점이 아니더라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여서 기업과 금융기관이 튼튼하고 효율적으로 경영되지 못한 상태에서 투자만 많이 하여 고도 성장을 추구한 결과 뼈아픈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맞았다.


정보통신(IT) 혁명도 좋고 첨단 지식 기반 경제도 좋은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초를 바로 하고 튼튼히 하는 것이다. 기업의 회계 장부를 믿을 수 있고, 의사의 진료비 청구서를 믿을 수 있고, 언론사의 세금 신고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엄정한 법 집행과 고도의 감시망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하고 우선적인 출발점은 철저한 자금세탁방지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정치권과 부정한 돈의 사슬을 끊는 것이야말로 정치 개혁을 앞당김으로써 경제 개혁과 사회 개혁에도 가속도를 붙이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정치권이 모처럼 좋은 선물을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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