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들 ‘특별한 회동’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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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초빙으로 승지원에서 만찬…구본무·정몽구 회장은 불참
지난 10월14일 오후 6시 서울 한남동 삼성 영빈관 승지원 앞 골목은 잇달아 진입하는 최고급 승용차들의 전조등 불빛으로 환했다. 에스원에서 파견된 경호원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는 가운데 재계 총수들이 한 사람씩 승용차에서 내려 승지원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박용오 두산 회장 등 회장단이 모습을 드러냈고, 원로자문단 소속인 김각중 ㈜경방 회장, 전경련 고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도착했다. 회장단이 아닌 최태원 ㈜SK 회장도 나타났다. 한국 실물 경제를 이끌어가는 재계 지도자들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만찬 초청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과 함께 ‘재계의 빅3’으로 분류되는 구본무 LG회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모임 시작 시간인 6시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삼성그룹 회장실 비서팀은 10월12일 구본무 회장과 정몽구 회장을 특별 초빙 대상으로 분류하고 수차례에 걸쳐 참석해 달라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순방을 수행할 때 재계 총수 8명이 승합차 한 대에 함께 타는 ‘고초’를 같이 겪었던 터여서 구회장과 정회장이 이회장의 초청을 수락할 것으로 기대했다.

모임이 끝난 10시30분까지 재계 2~3위 총수들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승지원 회동’은 김이 빠지고 말았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날 승지원 모임에서 참여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현명관 전경련 상근 부회장에 대한 경질이 논의되고 러시아 순방 길에 있었던 재계 총수 ‘홀대’에 대한 불만을 결집하는 자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구회장과 정회장이 참석하지 않으면서 재계 총수들의 회동은 지난 10월13일 개장한 삼성미술관 ‘리움’(Lee's Musium의 약칭)에 대한 축하 모임으로 바뀌었다.

이건희 회장, 재계 리더로 본격 나서나

재계 리더 21명은 신라호텔에서 파견한 요리사와 호텔리어가 차리는 프랑스 정식 요리를 3시간30분에 걸쳐 들면서 한담을 나누었다. 포도주를 곁들인 만찬 자리가 무르익어가자 이승윤 전 경제 부총리를 위시해 원로자문단이 경제 활성화 방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현명관 전경련 상근 부회장은 “지금까지 전경련 회장단 모임이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자리였으나 이번 회의(승지원 회동)에서는 재계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많이 나왔다”라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전경련 회장단 월례 모임을 겸한 이 자리에서 재계 총수들은 경제 살리기 차원에서 부품소재 업체를 육성하고 해외 자원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시장경제 교육 강화, 기업도시 건설 참여, 고학력 실업자 해소 방안에 대한 의견도 자유롭게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논의는 새로울 것이 없다.

당초 기대와 달리 용두사미에 그친 감이 있지만 재계의 리더 격인 이회장이 전경련 회장단 회의를 주재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이회장은 현명관 상근 부회장을 통해 전경련을 ‘원격 조정’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데다 참여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를 의식해 전면에 나서기를 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회장이 ‘은둔의 카리스마’를 깨고 재계의 리더로 전면에 나선다면 재계 최고의 이익단체 전경련의 영향력은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전경련이 아니라 ‘삼경련’이라는 국내 2~3위 기업의 불만이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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