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 리그
  • 김봉석 (영화 평론가) ()
  • 승인 200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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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겁지만 풍성한 ‘볼거리 잔치’
저스티스 리그’라는 만화가 있다. 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 등 초인들이 한데 뭉쳐 악당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각각의 초인들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왜 그들을 한데 모았을까? 그건 일종의 여흥거리다.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초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광경을 보고 싶다는 원초적인 호기심이 ‘저스티스 리그’를 만들어낸 것이다.

<젠틀맨 리그>의 출발점도 비슷하다. 대신 만화 속 초인들이 아니라, 근대 대중 소설 초기에 등장한 초인들이다. 흡혈귀·투명 인간·지킬과 하이드·네모 선장 등등. 그들은 각각의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능력을 이용해 하나의 팀을 이룬다. 롤 플레잉 게임에서 기사·마법사·도둑 등이 한 팀을 이루듯이 <젠틀맨 리그>는 제각각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 함께 뭉쳐 거대한 적에 대항한다.

원작 만화의 철학 사라진 기발한 오락 활극

근대 소설의 주인공들이 하나로 뭉쳐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나선다는 <젠틀맨 리그>의 설정은 듣기만 해도 황당하고, 영락없는 아이들용 활극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수가 있다. <젠틀맨 리그> 원작 만화의 스토리를 쓴 사람은 1980년대 중반 미국 만화에 혁명을 가져온 앨런 무어다. <프롬 헬>의 원작자이기도 한 앨런 무어는 아이들의 오락으로 치부되었던 만화를 어른들의 ‘그래픽 노블’로 격상시킨 스토리 작가다. <젠틀맨 리그>의 원작 역시 근대 영웅들을 한데 묶어낸 음울하고 초현실주의적인 그래픽 노블이다.

아쉽게도 영화로 만들어진 <젠틀맨 리그>는 앨런 무어의 기본 설정만을 가져온다. 철학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기운은 모두 사라진 채, 기발한 오락 활극으로 만족한다. 인디애나 존스의 선배 격인 사냥꾼 앨런 쿼터메인(숀 코네리)은 대영제국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에 돌아온다. 정보국 요원 M은 쿼터메인을 대장으로 투명 인간, 네모 선장, 흡혈귀 미나 하커, 불사신 도리안 그레이 등을 모아 젠틀맨 리그를 결성한다. 젠틀맨 리그는, 전세계 과학자들을 납치해 신무기를 만들고 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악당 팬텀을 찾아 나선다.

물론 이것은 모두 허구이다.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황당무계’한 이야기이고, 인물들이다. 하지만 <젠틀맨 리그>는 리얼리티를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이고, 그 시절 대중 소설의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이야기다. 게다가 <블레이드>를 연출했던 스티븐 노링턴 감독은 오로지 멋진 액션과 영상에만 집중한다. 조금 눈을 낮춘다면 <젠틀맨 리그>에는 즐거운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거대한 칼 모양으로 만들어진 노틸러스호나 몽골의 얼음 호수 위에 지어진 거대한 요새 등 멋진 그래픽이 먼저 눈길을 끈다. 독특한 능력을 가진 초인들의 싸움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눈을 즐겁게 한다. 그것만이 <젠틀맨 리그>의 목적이다. 목적 달성에 성공한 <젠틀맨 리그>는 킬링 타임용으로 충분하지만, 싱겁다는 느낌만은 떨쳐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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