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렌즈에 비친 회화사의 미스터리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3.10.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명화의 비밀>
먼저 105쪽 그림부터 보자. 왼쪽은 15세기 중반, 오른쪽은 16세기 중반 것으로서, 갑옷 차림의 중세 기사 그림들 가운데서는 둘 다 수작으로 꼽힌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두 작품은 많이 다르다. 왼쪽 것이 어딘지 어색한, 양식화한 세부 묘사를 보이는 반면, 오른쪽 것은 훨씬 ‘현대적’이다. 얼굴이나 갑옷의 세부가 사진처럼 실감나고, 특히 빛의 반사라든가 사슬갑옷의 곡선이 완벽하게 처리되어 있다. 두 작품 사이에 가로놓인 100년 남짓한 시간적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기량 차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다. 이럴 때 미술사가들은 흔히 ‘천재’라는 개념으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한다. 위대한 천재야말로 회화사의 비약을 가능케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명화의 비밀>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펴냄)에서 아니라고 말한다. 회화사의 비약은 천재보다는 ‘도구 발견’(혹은 활용)에 빚지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도구는 거울과 렌즈다.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거울과 렌즈를 조합한, 요즘의 환등기 비슷한 광학 장치를 작품 제작에 활용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 ‘카메라 루시다’ 등으로 불리는 광학 장치를 이용해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종이나 캔버스)에 투영한 다음, 거기 반사된 이미지를 모사함으로써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적 세부 묘사가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회화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를 만큼 대담한 저자의 이같은 가설은 앵그르의 초상화에서 느낀 의문에서 비롯했다. 저자는 자신의 화가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더듬어 찾는’ 일반적인 그림 방식(그는 이를 ‘눈 굴리기’라고 표현한다)으로 앵그르처럼 정밀하고 생생하게, 게다가 빠르게 그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카라바조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라파엘로 같은 숱한 거장들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저자는 2년여 동안, 르네상스 시대를 중심으로 15∼19세기의 걸작 수백 점을 꼼꼼하게 검토했고, 마침내 앞의 가설을 이끌어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왕의 미술사 상식을 뒤집는 증거물 모음이 된다. 예컨대, 원근법을 적용했다면 하나여야 할 소실점이 같은 화면에 둘이 등장하는 작품일 경우, 지금까지는 ‘잘못된 원근법’이나 원근법의 ‘의도적인 왜곡’쯤으로 넘어갔다. 기하학적 엄격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원근법에 비해 렌즈는 시점 이동이 자유로웠던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일종의 밑그림인 드로잉과 실제 완성품의 크기가 정확한 비례 관계를 보이는 경우도 광학 장치의 기계적 정밀성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16세기 들어 정물화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왜일까? 아직 원시적 수준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광학적 투영법을 적용하는 데 정물화가 기술적으로 가장 유리해서다. 정물화는 풍경화보다 크기가 작고, 초상화처럼 움직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16세기 말의 초상화에 왼손잡이가 갑자기 많이 등장한 것 또한 전후좌우가 바뀌는 광학 장치의 속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상화를 그릴 때 거울을 사용했다’는 기록에서 초상화가 의미하는 바는 자화상에 국한하지 않는다. 19세기에 이르면 광학 장치를 이용한 작품들이 급격하게 퇴장하고, 대신 인상파나 입체파 같은 반광학적이고 비사실적인 ‘어색한’ 그림이 부활한다. 사진 발명으로 종래의 소박하고 조잡한 광학 장치가 무용지물이 된 까닭이다.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물들과 함께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를 끄는 부분은 저자가 자신의 가설대로 실제 작품을 제작해본 실험 결과들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고심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느 화가가 어떤 광학 장치로 무슨 그림을 제작했다는 문헌 기록이나 실제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을 발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실험은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겠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경비원들을 카메라 루시다 앞에 앉혀 놓고 그린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영문도 모른 채 실험 모델이 된 친구의 초상화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도 있다. 독자 처지에서는 광학 원리를 쉽게 이해시키는 오리엔테이션 대목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저자는 거울과 렌즈를 키워드로 삼되 그것들을 사용해 얻은 거장들의 천재성도 함께 존중한다. 걸작의 신비는 벗겨내지만 명예를 훼손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상허 이태준 수필집 <무서록>을 보면 상허가 추사의 병풍 글씨 두 폭에 미농지를 대고 연필로 모사한 다음, 그 윤곽선대로 붓질을 해보며 추사 글씨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 이야기가 나온다. 데이비드 호크니 역시 화가들이 광학을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작품들이 달라 보인다며 이렇게 말한다. ‘광학은 단지 이미지와 측정 수단을 제공했을 뿐이다. 작품의 구상은 화가의 몫이었고, 기술적 문제를 극복하고 렌즈 이미지를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뛰어난 기량이 필요했다.’ 미스터리가 풀려도 위대함은 여전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