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사라진 ‘뒷골목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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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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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재신임 제안이 내년 총선에서 통합신당이 이기게 하는 전략이든 아니든 별 관심 없다. 지금의 정당 구도를 바꾸고 의회 정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지난 호에서 편집장이, 등록금 못 내는 학생이 늘어나는 건 심각한 위기의 조짐인데 재신임 문제로 바쁜 정치권이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겠냐고 일침을 놓았다. 맞는 얘기다. 특히 장기적으로 중요한 문제라면 당분간 정치권의 관심 밖이다. 재신임 투표에 8백억원이 드니 어쩌니 하지만, 재신임 정국의 사회적 비용은 단순히 돈계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 혼란은 막대한 국가적 에너지의 소모다.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을 둘러싸고 ‘올인’이니 ‘풀 베팅’이니 하는 도박 용어가 난무하고 있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면 대통령으로서는 5년으로 보장된 지위를 걸고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 사실이다. 국회가 내각의 주요 각료 한 사람을 뚜렷한 이유 없이 날려버려도 속수무책이었고, 자신이 지명한 감사원장 후보는 하프스코어에 가까운 표차로 임명이 좌절되었다. DJ 정부 시절에도 여소야대가 있었지만 이처럼 심하게 균형이 깨진 적은 없다. 이런 식이라면 임기는 4년 넘게 남았으되 이름뿐인 대통령인 것이다.
이런 사태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실책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대통령으로서는 ‘당정 분리’ 원칙이나 ‘지역당 탈피’라는 명분보다는 과거 집권당들이 해왔던 것처럼 야당 의원들을 탈당시켜서 여당세를 불리는 현실적 비책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태의 책임을 대통령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거의 매일 언론과 야당의 비판을 받아왔지만 지난 8개월간 야당은 어떠했나. 간단히 말해서 거대 야당의 위력 시위, 정부와 대통령 흔들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한총련 시위대가 미군 부대에 진입한 책임을 물어 행정자치부장관을 해임하겠다는 데서는 국민을 설득할 명분 같은 건 아랑곳않는 대신 총선을 앞두고 행자부를 붙잡아두겠다는 저의만 읽힐 뿐이다. 국정감사에서 송두율 교수 문제와 관련해 강금실 법무부장관에게 “사과 안 했다면 탄핵 사유 됐을 것”이라고 하거나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에게 “김두관 전 장관처럼 해임돼서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느냐”고 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발언은 다수 당의 오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통령과 행정부 흔들기도 정도와 수준 문제다. 지금의 의회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잃어버린 채 슬럼화하고 있다.

재신임 제안에 대해 난국 타개용이니 국면 전환용이니 하고 비판하지만 그건 비판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단순히 한 개인의 정치 생명이 달린 문제라면 모르되 국가 사회의 진로가 걸린 문제에서라면, 난국이면 타개해야 하고 나쁜 국면이라면 전환시켜야 한다. 해결책이 없으면 불행이지만 재신임 투표가 도움이 된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정치는 개인의 이해보다는 공적인 어떤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정치인이 정치 권력을 목표로 삼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의 명분을 잊은 발언이나 처신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야 한다. 명분을 잃고도 정치권에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치인들을 보면 딱할 뿐이다.

야당은 대통령의 정치력을 비난하지만 내 눈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훨씬 정치인답다. 일단 그의 명분이 옳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지역 구도를 탈피한 정치·정당을 주장해 왔다. 30년 군사 정권은 ‘영남 집권당-호남 야당’ 체제를 굳혔고, 지금의 정치적 혼란도 결국은 특정 지역·특정 정파의 권력 독점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군사 정권 후유증’인 셈이다. 만일 노대통령 임기 중에 정당들이 지역 구도가 아닌 순수한 의미의 보수와 혁신 구도로 재정립된다면 그것은 정치 개혁이라 부를 만하고 업적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재신임 제안이 총선에서 통합신당이 이기게 하려는 전략이든 아니든 나는 별 관심 없다. 지금의 정당 구도를 바꾸고 의회 정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이 희망 사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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