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하고 경박한 ‘문화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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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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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 홍보 사업’이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대신, 한국 정부의 선전 활동으로 변질되거나 교민 단합대회로 전락하는 폐습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이벤트였다. 지난 10월9일 소설가 황석영과 시인 황지우가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해 자기 작품을 낭독한 것은, 동아시아 작가들의 방문이 잦은 편인 컬럼비아 대학 캠퍼스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산재단 주최 ‘미국 중·동부 대학 순회 한국 작가 작품 낭독회’ 일환으로 열린 그 모임에는 70~80명에 달하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참석해 작가들의 발언과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황석영과 황지우는 소설과 시에서 각각 일가를 이룬 한국어의 명인답게 능란한 화술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청중의 대다수를 이룬 한국계 미국인과 한국인 유학생 들은 모처럼 이루어진 유명 한국 작가들과의 만남에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대산재단의 한국 작가 작품 낭독회 같은 한국 문화 해외 홍보 행사는 정부와 민간 양쪽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업이다. 특히 영화산업을 필두로 문화산업이 가져다 주는 국가와 기업의 이익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한 사업이 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의 경우, 대산재단 같은 민간 단체 외에도 한국문학번역원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등 정부 단체가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며 작품 번역, 작가 파견, 학술 지원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민간의 한국 문화 홍보 사업이 재고할 여지가 많다는 것은 종종 지적되어온 사실이다. 한국 문화 홍보 사업은 일반적으로 해외에 문화 한국의 이미지를 심고 한국 문화 상품의 시장을 개척한다는 목적을 띠고 있지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건전한 흥미를 유발하는 대신, 한국 정부의 선전 활동으로 변질되거나 한국 교민 단합대회로 전락하거나 하는 폐습은 아직 근절되지 않았다.

홍보 중심의 ‘해외 한국 문화 사업’이 안고 있는 한계는 이번 작품 낭독회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미국 사회에 퍼져 있는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의 본산지가 대학임을 감안하면, 행사 장소로 대학을 택한 취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낭독’은 대학에 어울리는 기획이 아닐 뿐더러, 대학의 이점을 살린 기획은 더더구나 아니다. 황석영과 황지우는 한국인이 긍지를 가질 만한 작가답게 훌륭한 말의 연기를 보였지만 뉴요커들의 학문적 성채(城砦)에서 열린 문학 모임다운 지적 흥분은 없었다. 진지한 청중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일본 문학 교수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문학 교수가 전혀 없었고, 한국 관련 분야 전공 학생과 뉴욕의 한국 교민이 대다수였다. 결국 한국 최고의 작가들이 개교 250주년을 맞은 아이비 리그 대학을 찾아가 벌인 낭독회는 미주한인회가 치러도 상관없을 행사가 되고 말았다.
사실, ‘홍보’라는 것만큼 문화 문제에 대한 경박한 발상도 없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가 역사적으로 형성한 삶의 양식 전체에 걸쳐 있다. 따라서 문화는 한국 기업이 만든 제품을 미국 시장에 내놓듯 다른 나라로 전달되지 않는다. 문화의 통관 절차는 훨씬 복잡하다. 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알아주기 바란다면 한국 문화를 학습하고 향유하고 논의하는 일이 미국인의 관점에서, 나아가 인간 보편의 관점에서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일임을 인정하는 환경이 먼저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핵심은 미국에서 학문의 모든 분야에 걸쳐 한국에 관한 지식이 활발하게 생산되도록, 한국 문화에 대한 취미와 조예가 미국 고급 문화의 일부가 되도록 지원하는 데 있다.

미국의 대도시를 방문한 한국인이면 대체로 중국 문화나 일본 문화가 차지한 지위에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러한 지위의 바탕에 오랜 세월 축적된 중국학과 일본학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컬럼비아 대학만 해도 중국학은 100년의 역사를, 일본학은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외 한국학의 토대가 없는 한국 문화 행사는 아무리 요란하게 치러도 촌극이다. 그것은 한국 연예인의 미주 한인사회 방문 공연처럼 미국 내 소수 민족의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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