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 시사저널 편집장 ()
  • 승인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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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 법정’이 열렸다. 법정에서 8개국 할머니들은 피 맺힌 한을 토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는 재판 기간 내내 일본 우익 단체들의 차량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들 사전에 ‘참회’란 없는가.
1946년 5월3일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역사적인 재판이 열렸다. 이름하여 극동국제군사재판, 흔히 도쿄 재판이라 불린다. 이 재판은 1948년 11월4일 판결 공판이 시작되기까지 2년6개월이 넘게 진행되었다. 8백18회나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포함한 증인 4백19명이 증언대에 섰으며, 방청객 수가 모두 2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공판 조서가 4만 9천8백58쪽에 달하고, 종이가 100t 소요되었으며, 재판 비용으로 9백만 달러가 지출되었다고 하니 재판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으뜸가는 전쟁 범죄자는 관동군 헌병사령관으로서 악명을 떨쳤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였다. 결국 그를 포함한 A급 전범 7명은 1948년 12월23일 오전 0시1분 쓰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나치 전범들을 처단한 뉘렌베르크 재판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데 비해 도쿄 재판은 상대적 무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일본 제국주의의 최고 지도자 히로히토(裕仁) 왕은 면죄부를 받았다. 731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생체 실험도 불문에 부쳐졌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2000년 10월7일 또 하나의 도쿄 재판이 열렸다.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 법정’이다. 이 법정은 반 세기 전의 도쿄 전범 재판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민간인(단체)에 의해 열리는 이 법정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으며, 12월12일 판결이 이루어지므로 재판 기간을 따진다면 150분의 1도 안된다. 증언대에 서는 증인들도, 그들이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대개가 일흔이 넘은 이름 없고 권력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이다. 종이가 100t씩 쓰일 리 없고, 9백만 달러가 넘는 재판 비용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국제 법정이지만 이것이 지닌 의미는 반 세기 전의 도쿄 전범 재판보다 훨씬 무겁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주도해 진행한 과거의 재판에서는 피해 당사자인 아시아 나라의 목소리가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이번 법정에서는 남북한을 포함한 아시아 8개국 정신대 할머니들의 피 맺힌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정치적 흥정의 결과였겠지만, 과거에는 히로히토 일본 왕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그일지라도 이번만큼은 성노예 전범 명단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히로히토 면책과 관련해서 도쿄 전범 재판 당시 재판부 내에서도‘태평양전쟁의 주요 책임자는 히로히토인데 다른 공범자가 그 대신 처벌받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등의 소수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무엇보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아예 무시되었던 반인륜적 범죄를 재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번 도쿄 법정의 의미를 돋을새김하게 된다. 전쟁 중의 강간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같은 범죄 행위는 처벌되는 법이 없었다.

‘성노예 전범 법정’은 ‘인간 회복 법정

“전쟁 중의 성폭력 문제는 이야기하기 힘든 문제다. 그래서 증언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를 빼놓는다면 우리는 전쟁의 실태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 지난 12월10일 오후 일본군 가해자가 털어놓은 증언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겠지만, 전쟁 중에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전쟁이라는 상황 논리로 얼버무려지는 반인륜적 폭력은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런 뜻에서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 법정은 전인류가 전쟁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참회함으로써 인간됨의 길을 찾으려는 ‘인간 회복 법정’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그 기간 내내 법정 밖에서는 일본 우익 단체들의 차량 시위가 계속되었다. 법정이 선 구단(九段) 회관의 위치도 사뭇 의미 심장하다. 회관의 지근 거리에는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위패가 ‘모셔진’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일본이 패망한 8월15일이 되면 전범을 기리는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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