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 풍성, 구성은 허술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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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 이광훈 출연 : 정준호·김효진·김혜리
호(狐)가 아니고 호(湖)다. 여기에 부드럽게 휘날리는 옷자락이 담긴 영화 포스터는, 괴담이 아니라 고풍스런 옛 사연을 담게 되리라는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천년호>(연출 이광훈)는 상상력과 액션, 사랑 이야기가 균형 있게 담긴 정통 판타지 무협 멜로다.

배경은 박혁거세왕이 신라를 창건한 지 천년이 지난 통일 신라 말기. 영화는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 박혁거세가 신목을 섬기던 한 부족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열었다고 말한다. 절멸된 아우타족의 피는 그들의 터전에 그대로 남아 호수를 이루고, 박혁거세는 신검으로 호수에 담긴 그들의 원혼을 봉인해 둔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신라 말 진성여왕(김혜리) 치세기는 골품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 지배층은 들끓는 민심을 수습할 방법도,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성여왕이 총애하는 장수 비하랑(정준호)만이 홀로 동분서주한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진성여왕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비하랑에 대한 연모의 정을 끊어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를 유혹한다. 하지만 비하랑은 여왕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을 갖고 있을 뿐, 그의 가슴 속에는 한 평민 소녀가 들어차 있다. 그녀의 이름은 자운비.

자운비(김효진)는 천년호(千年湖) 주변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그녀를 길러주는 묘현은 원혼을 봉인한 신검을 지키는 제사장이다. 자운비는 그 운명을 물려받게 되어 있는 인물. 하지만 비하랑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쫓기다가 천년호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리고는 아우타의 정령이 되어 깨어난다. 아우타족의 원한은 신라의 사직을 멸하려 든다. 여왕의 수호천사인 비하랑과 여왕을 없애야만 하는 자운비. 그렇게 두 연인은 비극적인 운명 앞에 서는 것이다.

<천년호>는 영화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촬영했다. 한국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위엄 있는 궁전이나 신령스러운 숲과 마을의 풍광이 모두 중국산이다. 복식도 볼거리다. 진성여왕이나 지배층은 퇴폐미를, 자운비는 순박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의상을 선보인다.

진성여왕 캐릭터·역할 불분명

하지만 이 작품이 제자리걸음인 판타지 무협 멜로 행보를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침대>가 성공을 거두었을 뿐 <단적비연수> <비천무> <무사>나 <청풍명월>은 그닥 공명을 얻어내지 못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점에 매혹되어 번번이 달려들지만, 상상력의 여지가 광활한 만큼 그 공간을 생동감 있게 메우기가 어렵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했을 뿐이다. <천년호>는, 대담하게 판타지와 사극의 요소를 결합했지만 그 연결 고리인 진성여왕의 캐릭터와 역할이 불분명해 갈지자가 되고 말았다.

다만 대작 영화치고는 경량급이다 싶은 두 주연 배우는 맡은 몫을 훌륭히 해냈다. <가문의 영광> 등에서 코믹 연기로 인기를 얻은 정준호는, 정색하는 연기에 도전하고 싶었다는 바람대로 비하랑 역을 무난하게 소화했고, 평민 소녀 자운비의 김효진은 기대 이상의 자태와 연기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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