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 셀러’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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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단턴 지음 <책과 혁명>
다니엘 모르네의 책 제목대로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을 책에서 찾을 수 있다면, 과연 그 목록은 어떻게 채워지게 될까? <백과전서>를 비롯해 루소·디드로·볼테르·몽테스키외 등 계몽 사상의 고전들이 아마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혁명에 참여하고 동조한 대다수 민중이 실제로 그 책들을 읽었는지는 의문이다. 고전이라고 불리며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책과, 과거 사람들에게 많이 읽힌 책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고양이 대학살>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주명철 옮김, 길 펴냄)은 ‘18세기 프랑스인은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그 책들이 정말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을까’를 규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저자는 ‘유명한 저자가 쓴 위대한 책’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라고 권고한다. 대신 ‘금서 베스트 셀러’라는, 역설적이지만 매혹적인 존재에 주목한다. 혁명을 전후한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철학책’이라고 불리며 ‘외투 밑’에서 쓰이고 유포된 ‘불법 문학’의 실체를 규명함으로써, 2류·3류 작가들의 ‘잊힌 베스트 셀러들’ 또한 프랑스 혁명에 기여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서적 거래에 참여한 집단(저자·출판사·판매상·독자·검열관)의 네트워크와 관행을 복원하고, 책을 통한 이념의 표현과 여론 전파 경로를 밝혀내는가 하면, 정치적 욕설이나 파렴치한 추문, 중상모략을 담은 책들이 어떻게 혁명적일 수 있느냐를 논증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의 작은 마을에 있던 뇌샤텔 출판사 다락방에서 찾아낸 자료 5만여 점을 ‘성실하고 우직하게’ 분석했다. 그 가운데서도 혁명 전야의 3대 금서 베스트 셀러로 꼽히는 <계몽사상가 테레즈>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 <2440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예컨대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육체적 즐거움의 절정을 향해 한 걸음씩 올라간 (여주인공의) 사소한 모험들’을 그린 책인데, ‘철학적 포르노그래프’라고 명명된다. 성애(그것도 난교)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성애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형이상학적 대화가 번갈아 서술되고 있어서다. 자유로운 삶(성애)과 자유로운 사고(대화)가 결합하면서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아무 것도 신성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테레즈는 침실로 안내하는 방식으로 혁명에 참여했다.’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왕과 궁정 사회의 성 추문을 다룬 책이다. 뒤바리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서 베르사유 궁에 입성해 영화를 누렸지만, 원래는 돈 몇 푼이면 누구나 안을 수 있었던 거리의 매춘부 출신이다. 그녀는 왕의 품위를 하락시키는 상징이었다. 부르봉 왕조로 대표되는 앙시앵 레짐의 정통성을 보장하던 신성함의 실체를 까발림으로써, 혁명을 부를 수밖에 없는 혁명 이전 프랑스 정치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구실을 했다. 반면 <2440년>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이상향을 다루었다. 현실의 앙시앵 레짐을 직시할 수 있도록 상상의 2440년을 설정해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비판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들이 혁명의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결론짓는 대신, 그것들이 시대의 담론과 역사를 만드는 단서가 되었다고 말한다. ‘책은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금서는 앙시앵 레짐의 정통적 가치를 모든 방면에서 비꼬고 공격하는 ‘정치적 민담’을 만들어내 독자들을 새로운 사상과 시대 조류에 물들게 했다는 것이다. 한 파리 치안총감의 말처럼 ‘파리 사람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허가를 받아 인쇄되고 발간된 사실(곧 합법 서적)보다 은밀히 떠돌아다니는 사악한 소문과 중상비방문(곧 금서들)을 더 많이 믿었다.’ 책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금서 베스트 셀러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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