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서 도망치는 10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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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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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왕따시키고 자기는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하는 우리 사회가 편집증적인 사회이기는 하지만, 사랑에 관한 노래만큼은 사랑하는 상대방에게만 한없이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랑에서 도망치고 있다. 30∼40대 여자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를 노래하는 <나훈아 쇼>에 몰리는 동안 10대들은 빠른 속도로 사랑에서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N세대는 사랑을 지난 세대 사람들처럼 수렴의 형태, 만남의 형태로 이해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사랑에서 도망치려고 하고 사랑을 이별의 전제 조건이나 발산의 형태로 이해한다. ‘떠나갈 사람 앞에/헤어질 사람 앞에/정든 임이 울고 있네…’라고 과거에 은방울 자매가 불렀던 <무정한 그 사람>같이 절절한 멜로디를 가진 노래 가사가 지배적인 경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노래하는 가수나 곡들이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노래를 보면, 가령 ‘갈테면 가, 두 번 다시 뒤도 돌아보지 마’ 하는 식의 가사도 눈에 띈다. 노래 자체도 멜로디적이라기보다는 명령과 설명 투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이 뭔가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이별을 할 때 떠나는 사람은 늘 당신이거나 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나부터 떠나거나 딴 사랑 때문에 상대방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따위(백지영의 <부담>)가 그러하다.

‘사랑=집착과 구속의 대상’은 옛말

그렇지만 이제 젊은 세대는 이별하는 순간 과거처럼 ‘정 두고 어이 가리’(<무정열차>)라고 노래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은행나무 침대>에서처럼 신비화하고 사랑에 관한 영화를 즐겨 보기는 하지만, 사랑을 과거처럼 집착과 일방적인 구속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서 가령 조용필의 <미워 미워 미워> 같은 노래에 나오는 ‘잊으라면 잊지요/그까짓 것 못 잊을까 봐’라는 노랫말처럼 ‘못 잊겠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지마/더 이상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걱정하지마’(김건모의 <부메랑>)라고 노래하거나 ‘나를 버린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바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곡씩 쏟아져 나오는 많은 대중 가요를 일일이 다 범주화하고 거기서 발산으로서의 사랑을 노래하는 전형적인 곡을 골라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너 하나뿐’이라고 외치는 노래가 절대적이기는 하지만, 사랑보다는 이별을 통해 스스로 서려는 용기를 기르거나(NRG의 ) 사랑의 포로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노래도 종종 눈에 띈다.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포로가 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만, 사랑을 편집증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편집증이란 한마디로 상대방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경주와 같은 것이다. 편집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것에 한눈 팔 시간이 없다. 조금이라도 딴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재산을 불리는 일만이 편집증적인 인간의 관심사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왕따시키고 자기는 판검사의 금메달이든 서울대의 금메달이든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하는 우리 사회가 바로 편집증적인 사회이기는 하지만, 사랑에 관한 노래만큼은 사랑하는 상대방에게만 한없이 눈길을 주지 않는다. 백지영의 <부담>처럼 딴 사람에게 한눈 팔기도 하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벤처, 벤처’ 하며 일등 국가를 외치는 시대와 달리, 사랑 속으로 핏발 세우며 달려들지 않고 옷소매를 붙들고 울며불며 매달리지도 않는다. 편집증적인 인간형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사랑의 중심을 향해 숨가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경쾌하게 춤을 추듯이 사랑을 구속과 집착의 중심에서 이탈시키며 상대방에게서 자기에게로 사랑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노래가 뭐 대단한 것이어서 편집증적인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니다. 대중 가요 자체가 편집증에 단단히 걸린 자본주의의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렴으로서의 사랑에서 빠져나와 샛길로 자꾸 빠져들어가려고 하는 욕망이 커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한 사람에게 사랑의 목을 매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사회 구조에서 나온 부자연스러운 감정일 경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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