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만이 아니다. 어디선가 나는 다음과 같은 표어를 본 적이 있다. ‘아빠는 음주 운전 엄마는 평생 눈물.’ 아빠가 음주 운전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면 엄마는 평생 눈물을 지으며 살 수밖에 없다. 엄마와 자식들이 모두 아버지만 쳐다보며 살아온 탓이다. 이른바 ‘부권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 표어의 내용은 우리에게 끔찍한 감정을 던져준다. 그 감정의 정체는 뭘까? 영화 <크래시>처럼 기계 문명의 결과인 자동차가 앞차와 부딪쳐 그로 인해 아버지가 죽고 사람이 죽고 하는 대형 사고가 끔찍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감정의 진짜 정체는 다른 곳에 있다. 사람이 죽는 자동차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왜 하필이면 엄마•아빠, 즉 가족의 이미지를 동원한 다음, 그런 이미지를 사고에 의한 죽음의 이미지에 연결했을까? 이것은 표어를 제작한 사람의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상상력이나 일상이, 가족의 품 안에서라면 모든 것이 수용되고 해결될 것이라는 가족‘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집은 가장 튼튼한 울타리라는 ‘집=울타리’ 비유에는 안식처로서, 즐거운 공간으로서 너무도 당연하다 할 집의 이미지를 통해, 국가와 사회가 감당해야 할 모든 공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집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집•가족이 개인의 운명을 책임지는 마지막 보루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가국주의(家國主義)’의 음모가 서려 있다. 하지만 그 인식(connaissance)은 인식이 아니라 오인(誤認•mes-connaissance)이다. 왜냐하면 가장 튼튼한 울타리는 사회이고 국가여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공공 영역이 전무한 나라에서는 (증액이 되었는데도 1조원에 미치지 못하는 2000년 회계 연도 복지 예산을 보라) 유난히도 가족•집의 이미지가 강조되는데, 나는 이것을 가국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가국주의는 국가주의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에 녹아 있는 국가주의의 실체
‘국가’라는 글자를 뒤바꾸어 쓰면 ‘가국’이 되는 것은 결코 말장난이 아니다. 국가주의는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의식을 오인의 함정에 빠뜨리는 가족주의, 가족주의의 이미지를 동원하는 가국주의에도 있는 것이다. 박정희 기념관을 구미에 건립하겠다는 움직임만이 국가주의의 형태는 아니다. 국가주의는 바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녹아들어 있다(예컨대 텔레비전의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 지금도 IMF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지만 IMF가 나에게 주는 교훈은 단 한 가지이다. IMF 위기 극복에 공을 세운 금 모으기 운동이, 표어나 포스터가 가족의 이미지를 동원하듯이 가족을 실제로 동원했던 국가주의의 단적인 예라는 교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텔레비전에서 ARS라는 글자만 보면 속이 편하지 못하다. 국가가 사회의 틀은 짜놓지 않고 언제까지 가족•개인의 호주머니에 손을 벌릴 것인지. 천연 재해든 IMF 같은 인공 재해든 일만 터지면 가족과 이웃의 훈훈한 ‘정’을 뇌까리며 코흘리개의 돈까지 걷어가는 국가와 사회의 모습. 이것은 오인의 수준을 넘어선 일종의 사기 행각이다. 아니, 그 놈의 ‘정’에 숨겨져 있는 폭력, 사회 문제를 가족과 개인(아버지) 문제로 축소시키는 국가의 폭력 이다. 이렇게 ‘사회’를 ‘가족’으로 치환한 예는 가수 현 숙씨 노래에 함축되어 있다. ‘아빠가 떠나신 지 사계절이 왔는데 지금은 타국에서 얼마나 땀흘리세요/지금도 보고파서 가족 사진 옆에 두고 당신만을 그립니다/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 당신만을 사랑하니까.’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