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 한국 노장 가수들 “산타나가 부럽다”
  • 成宇濟 기자 ()
  • 승인 2000.03.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노장 가수들은“산타나가 부럽다”
3월6~1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시인과촌장 음악회>는 청중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 주었다. 어느덧 마흔 줄에 이른 시인과촌장은 공연장을 찾은 동년배를 상대로 모험을 감행했다. 1980년대 전성기 음악을 중심으로 무대를 꾸민 것이 아니라, 하덕규·함춘호 씨가 다시 만나 발표한 새 음반에 담긴 신곡으로 프로그램을 짠 것이다.

물론 가수 조성모가 리메이크해 요즘 인기 절정인 <가시나무>를 불러 ‘팬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악회의 주된 목적은, 신곡 <뿌리> <가시나무Ⅱ> <다리> 들을 발표하는 데 있었다.

객석을 가득 메워 그들의 재결합을 환영한 30~40대 팬들은 ‘향수 상품’보다는 ‘신상품’에 더 열광했다. 나이 들어 오랜만에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자기들만큼이나 변한 시인과촌장의 노래에 크게 고무되는 모습이었다. 시인과촌장의 새 노래에는, 1980~1990년대를 함께 통과해온 바로 그 세대의 정서가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던 포크에 록의 강한 비트가 섞인 새로움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덕규씨의 목소리에는 로커와 같은 힘이 실렸고, 현역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는 함춘호씨는 기타 아홉 대를 번갈아 사용하며 관록이 붙은 연주 세계를 과시했다.

<시인과촌장 음악회>는 요즘 한국 대중 음악계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공연이다. 10대 젊은 대중이 대중 문화의 주 소비자가 된 이후, 나이 서른만 넘으면 가수가 음악 시장에서 강제 퇴출되는 일이 한국에서는 이제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시인과촌장 ‘상큼한 컴백’

한국의 노장 가수들은 얼마 전 미국 대중 음악계에서 벌어진 큰 사건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적 산타나인데, 우리로 치면 키보이스가 흉내 내던 산타나인데, 그 노장이 현역으로서 그래미상을 8개나 휩쓰는 것을 보고 정말 눈물 나도록 반갑고 부러웠다.” 3월11~19일 세실극장에서 데뷔 43년 만에 첫 소극장 공연을 하고 있는 가수 현 미씨의 말이다.

현 미씨의 말대로 ‘한때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그 인기 있던 노장 가수들이 한국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쉽게 잊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 문화 가운데 유독 음악 장르에서만 노장이 노장 대접을 받지 못한다. 오랜 세월 음악 생활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노장만이 갖는 깊은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일 마당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에서 어쩌다 한번 얼굴을 내밀 수 있고, 그나마도 폭스트로트 장르만 꾸준히 대접받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미사리·양평 등지의 라이브 클럽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 새로운 성인 음악의 산실 구실을 전혀 못하고 있다. 노장들은 그곳을 가수의 종착지라는 의미로 ‘가수의 무덤’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얼마 전 세실극장에서 2년여 만에 콘서트를 연 가수 이광조씨는 데뷔한 지 25년이 된 ‘발라드의 원조’이다. 지금까지 독집 음반을 19장이나 발표한 그는 “이 나라의 문화 풍토에 억하 심정이 있다”라고 말했다.

“콘서트를 한번 하면 천만 원 가까이 적자를 보지만 사람이 적게 왔다고 창피하거나 하진 않다. 무엇보다 서운하고 화가 나는 것은, 대중의 정서를 어루만지고 대중에게 힘을 불어 넣어준 가수를 영예롭게 보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통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문화 전반에 대한 우리 사회의 풍토를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가수의 관록을 ‘영예롭게 대접’하지 않는, 노장들이 맥을 못추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반 제작자가 음반을 제작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대중 음악=댄스 음악’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을 때, 그 획일적인 음악 풍토는 ‘개떼 근성’이라고 비하해 불리기도 했다. 문화가 아무리 돈벌이 수단으로 각광받는다고 하지만, 영화 같은 다른 대중 예술과 달리 대중 음악에서는 ‘돈 되는 장르’에만 제작자들이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 장르란 물론 10대의 취향에 영합하는 댄스 음악이다.

제작자들의 그 습성은 시청률 지상주의를 앞세우는 공중파 방송과 결합해 음악 문화를 단순화하면서 성인 가수와 대중을 소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물론 <이소라의 프로포즈> 같은 성인 취향 음악 프로그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IMF 이후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없앴던 공중파 방송들은 이름을 바꾸어 10대 취향 프로그램을 슬그머니 부활시켰다.

“20년 넘게 쌓아온 음악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야말로 작품을 내놓을 만하니까 흐지부지되는 상황이다. 음반 제작자들이 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10장 가운데 1장 정도는 소장할 만한 작품에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이 든 가수들이 예전과 같은 인기나 돈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가수 이광조씨의 말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빼어난 기획력으로 노장 가수들의 음악회를 잇달아 성공시킨 셀 기획 대표 엄세범씨(86쪽 상자 기사 참조)에 따르면, 노장들의 음악성이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노장 가수들이 그들의 세대가 아니라 자꾸 20대를 타깃으로 삼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자기 세대가 얼마나 냉정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엄씨가 보기에, 음반 제작자만큼이나 노장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대중 음악 인프라이다. 대중 음악 전문 공연장도 드물 뿐더러 그나마도 젊은 가수 중심으로 공연이 열리는 바람에 노장 가수들은 오갈 데가 없다. 이 때문에 뮤지션으로서 정상적인 행로를 밟아온 가수, 곧 창작 성과를 모아 정기적으로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을 여는 가수는 노장급에서 슈퍼스타인 조용필씨밖에 없다.성인 음악 침체는 세대간 단절 반증

한국 대중 음악에서 노장의 활약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가 그만큼 단절되고 소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국의 기성 세대는 젊은 시절 정서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게 영향을 받은 대중 음악을 소중한 문화 체험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좋아했던 노래가 ‘나의 성장에 영향을 준 문화’가 아니라 ‘내가 한때 좋아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모품’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다. 간혹 제작자가 나서도 노장 가수가 새 음반 발표를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홍보할 기회도 없이 시장에서 묻힐 것이 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자기 문화, 자기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자기 세대의 정서를 대변해온 뮤지션을 무시하는데, 그 자식 세대가 그 문화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이 때문에 대중 음악에 관한 한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며 비난하고, 그들 사이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1960년대 록 그룹 롤링스톤스의 공연장에는 지금도 전가족이 함께 와서 음악을 공유한다. 자식은 아버지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하고, 그 정서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는 전 세대의 음악을 자양분으로 삼아 음악 문화를 발전시킨다. 세대 간에 문화적 유대가 형성될 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 대화하고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산타나·에릭 클랩튼·이글스 등 노장 가수·밴드가 새 작품을 발표하고 현역으로 각광받는 것은, 대중 음악을 즐기고 소중한 문화로 간직하는 이같은 문화 풍토에서 말미암는다.

구미 팝계의 이같은 음악 환경을 늘 부러운 눈으로, 한국의 음악 현실을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본다는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의 말은 이렇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국에서 장르 소멸이라는 최악의 부작용까지 생겨날 수도 있다. 음반 제작자나 성인 팬들이 문화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노장들의 활동을 지켜줄 필요가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