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의 ‘매춘 편력’에 숨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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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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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심청>은 동아시아의 근대를 바라보는 한 관점을 제시하지만, 그 관점이 발상 전환을 촉진하는가는 의문이다. 청이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거세당한 남성들을 위안하는 여성상은 아닐까?”
소설가, 특히 남성 소설가 중에는 자신을 ‘건달’이나 ‘잡놈’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 호칭이 혹시 그 이력이나 성격에 들어맞는 경우가 있더라도 정직한 자백이라고 여기면 오해다. 자기 모멸적인 그 호칭은 한국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권력·도덕·문화로부터 자유롭다는 자기 긍지의 반어법이다. 공식 문화의 권위에 굴하지 않는다는, 공인되지 않은 경험에 봉사한다는 소설가의 자기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소설가가 비공식적 또는 반공식적 인간 경험을 다룬다는 생각은 실은 역사가 깊다. 그것은 왕조의 흥망을 기록한 역사와 비교하여 소설을 시정의 잡담으로 간주한 한자 문화의 산물이다. 과거 한자문화권 소설가들은 역사에서 배제된 시정의 세계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아 종종 ‘음담괴설(淫談怪說)’이라는 비난을 듣는 작품을 썼다. 음담은 소설가의 몫이었다. 17세기 중국의 리위(李漁)나 일본의 사이카쿠(西鶴)는 모두 에로틱한 이야기로 유명한 소설의 대가들이다.

부활한 심청 설화의 이데올로기
황석영의 <심청>은 소설과 음담의 오래된 친족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심청의 생애를 고쳐 쓰면서 그 지극한 효의 화신을 창녀 출신 여걸로, 그 헌신과 회생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매춘과 성애의 외설스런 이야기로 바꾸어놓았다. 저자의 <심청전> 개작에는 심청의 미담을 인신 매매의 역사 속에 돌려놓는 탈신비화의 동기가 작용했지만, 성을 인간사의 중심에 돌려놓는 재(再)에로스화 동기 또한 작용했다. 개작된 심청의 일생에는 청이를 첩으로 들인 팔십 세 노인의 방중술을 시작으로, 추잡한 것에서부터 농염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성의 일화가 풍성하게 들어 있다. 중국의 청루에서 일본의 요정에 걸친 청이의 편력은 19세기 동아시아 매춘 역사 탐방이라는 성격마저 가지고 있다.

<심청>은 항간에 널려 있는 도색 소설 중 하나는 물론 아니다. 동아시아 매춘 네트워크를 따라 펼쳐지는 청이와 그 주변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세계 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한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한 관점을 제시한다. 시장의 폭력에 시달리는 동아시아의 고난을 증언하는, 그러면서 또한 시장의 법칙에 굴하지 않는 동아시아의 기층 문화를 기억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청이가 굴욕과 고난의 와중에 보여주는 ‘가엾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청이 엄마의 ‘보살’ 태몽이 말해주듯 동아시아 민중에게 남아 있는 인간 세계의 구원에 대한 염원을 대표한다. 청이가 태몽의 예언을 실현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그녀가 지니고 있는 모성의 정치적 상관물, 예컨대 태평천국운동, 류큐 왕족의 애민주의, 난학파 지식인의 반바쿠후운동 등과 얽혀 있다. 심청 설화를 과거로부터 살려내 매춘의 역사와 풍속에 통합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근대에 대한 탐구로 발전시킨 작가의 노련함은 경탄할 만하다.

<심청>에서 자본주의 시장은 명확하게 젠더화해 있다. 그것은 영국 동인도회사 싱가포르 지사의 부지사 제임스가 세계 전부를 자기네 ‘시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하는 데서 나타나듯, ‘자유 무역’의 물결을 타고 돈벌이에 안달인 남성 인물들이 예시하듯, 남성이다. 청이와 그 밖의 여성 인물들은 이 남성의 폭력에 유린당하는 존재이면서 노래·예술·우애·자비를 통해 전(前)자본주의 문화를 대표한다. 청이가 보살이 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적인 것, 남성적인 것의 침탈을 겪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전자본주의적인 것, 여성적인 것의 우월성을 자각하고 표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자본주의/전자본주의, 남성/여성 양분법에 기초한 동아시아 재현은 비록 그 가치의 서열이 전도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변종이다. <심청>이 동아시아의 근대에 대한 발상 전환을 촉진하는가는 따라서 의문일 수밖에 없다. 청이는 혹시 자본주의 시장에서 거세당한 남성들의 정신적 위안에 봉사하는 여성상이 아닐까? 민중주의·동아시아사·여성주의의 장려한 융합을 만난 흥분에도 불구하고 삼가기 어려운 의혹이다.

황종연 (문학 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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