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포기한 미성년 사회
  • 이성욱 문화평론가 ()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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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의 경우이든, 세습 교회의 경우이든 모두 미성년, 다시 말해‘허약한 나’의 소산이다. 자기의 삶과 운명에 스스로 맞서지 못하고 그것을 간수하지 못하는 우리라면, 아직도 전근대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
예비군 훈련장! 여기에 모인 대한민국의 예비군들은 평소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정상적인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멀쩡하던 이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훈련장에 모이면 그때부터 돌연 ‘멍멍이’로 변신한다. 직장에서는 깔끔한 청년으로, 집에서는 자상한 아빠로 살아가던 그들이 예비군복 하나에 의해 아무데서나 방뇨하고, 악을 쓰고 시빗거리를 찾아 헤매는 용감무쌍한 한국의 ‘훌리건’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예비군복만 입으면 훌리건으로 둔갑?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빨간 명찰을 단 군복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앉았다 일어설 때도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일어서야 할 ‘연세’이지만 그의 몸에 군복이 입혀지는 순간 그 아저씨는 일순 20대 열혈 청년이 되거나 간간이 ‘마초맨’(수컷다움을 과시하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삼는 남자)으로 돌변한다. 빨간 명찰, 각이 진 군모, ○○전우회라는 빨간 글씨의 소형 버스 등과 어울리는 순간, 평소에 물렁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 아저씨들은 ‘악으로 깡으로’ 적과 박치기해야만 하는 20대 청년 병사의 기표로 녹아들어 가는 것이다. 일전 <한겨레> 신문과 고엽제 전우회의 갈등에서 무엇보다 장관이었던 것은 신문사 앞을 도배하던 군복이었다. 이제 초로의 길목에 선 그들이 군복을 입고 모여 있는 그 풍경은 적어도 외양으로는 예비군·○○전우회 등속에서 풍겨나는 이미지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온 이래, 20세기 한국은 세계 교회사에서 ‘이 시대 선교의 불가사의한 땅’으로 기록되고 있다. 선교 초입인 1907년 여름, 한국은 교회 천여 개, 전도사 3만여 명, 헌금액 8만여 달러(당시 노동자 하루 임금은 15∼25 센트)라는 신기록을 작성했다. 그런 사실에 대해 당시 장로교·감리교 선교사들은 경탄과 충격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충격과 경탄은 계속되는 이적으로 화했다. 한 교회에 수십만 교인이 모이고, 현금 보따리가 터질 정도로 매주 쟁여지는 거액의 헌금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이 땅이 개신교 역사의 이적을 보여주는 축복의 땅임을 증거하고 있다. 한데 그 거대 교회가 ‘유훈 통치’를 이루려는지 담임 목사권이 그 목사의 아들에게 세습된단다. 그리고 우리의 어린 양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그 목사의 인도를 착하게 따르고 있다고 한다.

언뜻 보면 서로 상관이 없을 듯한 위의 낱낱의 사태에서 나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미성년이라는 사실을 감촉한다. 위의 일은 형식만 다를 뿐 모두 ‘나’를, 나 아닌 다른 것에 위임해 버리는, 요컨대 ‘자기됨의 유기’에 해당하는 공통성을 가진다. 예비군의 일탈은 군복 혹은 군복의 무리 속에 자신을 은닉하는 형식이다. 자신은 각양의 군복으로 그려진 숨은 그림 속에 숨어 소리만 지른다. ‘나’는 유령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비군 훈련장에서의 난동이든 뭐든 그 행위의 주체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을 반성도 성찰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나’에 대한 성찰은 사유와 행위의 주체가 언제나 ‘나’이어야 하지만 예비군 아저씨가 행한 일은 ‘나’가 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 세습 사태는 교회에 혹은 목사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탁하는 형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목사라는 가부장제에 자신을 헌납하는 일이다. 가부장제는 ‘아버지(라는 제도)’ 이외는 모두 아버지의 소유권에 종속된다는 율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아버지 이외의 모든 존재는 엄밀히 말해 자신의 운명과 삶의 주체도 권력자도 아니게 된다. 그것의 운명은 모두 아버지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배당에 다니는 일은 자신의 삶과 운명을 신앙 고백을 통해 성찰하겠다는 결단의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목사직 세습에 고개를 돌리거나 거기에 합류하는 일은 자신의 운명을 목사 한 개인에게 맡겨 버리는, 다시 말해 자신을 유기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성스러운 ‘나’ 자신을 그런 식으로 더럽히는 것은, 실로 신성 모독이다.

요약컨대 군복의 경우이든, 세습 교회의 경우이든 모두 미성년, 다시 말해 ‘허약한 나’의 소산이다. 자기의 삶과 운명에 스스로 맞서지 못하고 그것을 간수하지 못하는 우리라면, 아직도 전근대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대는 철저하게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각에서 출발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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