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문학책 뒤에붙은 해설은 때로 본문을 잡아먹고 몸통이 된다. 그러나 그 관행은 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해설을 지탱하는 것이 문학의 논리가 아니라, 상품과 권력의 논리이므로.”
책의 몸통은 좁은 의미의 텍스트, 곧 본문이다. 그러나 책이 본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본문 주변에는 한 비평가가 ‘파라텍스트’라고 부른 곁다리글들이 자리잡고 있다. 서문이나 발문, 해제나 해설, 제목과 차례, 저자나 역자 소개, 책 뒷표지에 싣는 지인들의 덕담 같은 것들 말이다.책에 서문이나 발문을 붙이는 것은 동양에서도 오래된 전통이다. 저자보다 더 잘 알려진 손윗사람이 붙이는 경우에, 그 서문이나 발문은 책의 저자를 일반 독자에게 소개하는 한편, 서발(序跋)의 필자가 자신의 지적 권위로 본문의 품질을 보증하는 구실을 했다.
우리 출판계의 묘한 버릇 가운데 하나는 ‘발문’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이다. ‘발문’은 ‘서문’에 상대되는 말이다. 즉 본문 뒤에 붙은 곁다리글을 일컫는 다. 그러나 이따금씩 본문 앞에 붙어 있는 ‘발문’을 볼 수 있다. 나는 최근에도, 잘 알려진 소설가의 산문집 앞에 붙은 잘 알려진 시인의 ‘발문’을 보았다. 책을 낸 출판사는 그 소설가나 시인의 명성에 걸맞게 잘 알려진 데였다. 물론 말의 의미에 대한 최종 심판관은 그 말을 사용하는 대중이므로, 언젠가는 ‘발문’이라는 말이 서발을 아우르는 곁다리글을 지칭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닌 것 같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책 끄트머리에 ‘해설’을 붙이는 것이 일반화한 것은 70년대 이후인 듯하다. 그것이 독자를 계몽한다는 긍정적 구실을 맡아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런 관행을 거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해설’의 자기 증식이 우려할 만하기 때문이다. 물론 ‘해설’이 정당해질 수 있는, 나아가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일반 독자가 쉬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난해하지만 그 예술적 가치를 기록해야 할 작품이나, 오래도록 잊히거나 묻혀 있다가 새로 발굴되거나 해석되어 출판된 작품들의 경우 말이다. 또 일정한 관점으로 편집된 전집에도 ‘해설’ 자리를 둘 만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거의 모든 문학책 뒤에 붙어 있는 해설은 ‘문학적으로’ 옹호하기 힘들다. 그 해설은 때로 본문을 잡아먹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해설이 몸통이 되고, 정작 본문은 곁다리가 되는 수도 있다. ‘풀어 설명한다’는 해설이라는 말이 우리 문학판에서는 흔히 그 뜻을 잊거나 잃는다. 정작 해설이 필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 뒤에 붙은 해설인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관행이 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해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문학의 논리가 아니라, 상품의 논리이고 권력의 논리이므로.
텍스트 ‘살해’하는 저자의 약력과 사진
본문을 잡아먹는 것은 해설만이 아니다. 이력서나 신원 조회 보고서라도 작성하듯 한 삶의 궤적을 시시콜콜히 늘어놓는 저자 소개도 그렇다. 학력과 경력과 신분이 탐스러울수록 그 저자 소개는 상세하다. 그리고 그 이력의 화사함이 더러 본문의 가난함을 덮는다. 저자 소개보다 역자 소개가 더 상세한 경우도 있다. 유럽의 고등학생용 철학 용어집을 번역한 어느 젊은 철학자는 책 날개에다 아무런 소개 없이 저자들의 이름을 나열한 뒤(저자들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길게 소개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다란 역자 소개와 자신의 사진(!)을 실었다(물론 이 명민한 철학자가 그런 것이 아니라 출판사의 우둔한 편집자들이 그랬겠지만). 사실 ‘해설’이나 저자 소개 못지 않게 반(反) 텍스트적인 것이 저자 사진이다. 저자 사진은 텍스트 살해자다. 책 안표지에 숨어 있던 그 텍스트 살해자가 이제 바깥표지로까지 나오고 있다.
책 뒷표지의 덕담은 사실상의 광고 카피다. 그 관행을 당장 없애기 힘들다면, 책에 재킷을 두르고 그 재킷 위에 덕담을 실으면 어떨까? 텍스트와의 물리적 분리를 가능하게 해 심리적 거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하기야 그런 거리 두기는 덕담의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므로, 덕담 옹호자들이 받아들일 리 없겠지만.
파라텍스트가 텍스트를 잡아먹는 현상은 근본적으로 상업주의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심미안을 거스를 뿐이다. 나도 그런 일부에 속한다. 그러나 당장 이 페이지 중앙 상단의 뻔뻔한 사진이 증명하고 있듯, 나는 내 심미안의 배신자이고 텍스트 살해의 공범이다. 내 얼굴을 볼 때의 역겨움이 ‘문화 비평’난에 대한 욕심만큼 크지는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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