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전쟁과 꽃게 전쟁
  • 시사저널 편집장 직무대행 ()
  • 승인 199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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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왔을 때 ‘왜 총을 쏘아 막지 않았느냐’라는 어느 정치인의 발언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 말이 나온 바로 이튿날 교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당시 어느 한쪽이 작심을 하고 총을 쏘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유럽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즐겨 먹어 온 대구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그 중에는 영국과 아이슬란드가 세 차례 치른 ‘대구 전쟁’ 이야기가 있다.

1944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는 유일한 자연 자원인 대구 어장을 잘 관리해서 부유한 나라로 거듭나려는 꿈을 키웠다. 당시에는 영해가 해안선으로부터 3해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 배들이 ‘앞마당’에서 대구를 남획하자, 아이슬란드는 50년 4월 일방적으로 영해를 4해리로 확대했다. 58년에는 다시 12해리로 넓혔다. 모든 외국 배들이 12해리 밖으로 물러났으나 영국 트롤선만이 전함의 보호를 받으며 버티자 제1차 대구 전쟁이 터졌다. 큰 충돌은 없었지만 이 전쟁은 2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아이슬란드는 영해를 50해리로 확대하겠다고 선언했으며, 75년에는 한술 더 떠 2백 해리 영해를 주장했다. 또다시 발생한 제 2, 3차 대구 전쟁. 아이슬란드 경비선이 외국 배의 그물을 절단하고, 두 나라 배들이 서로 들이받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아이슬란드 전함이 영국 배를 향해 포탄을 발사해 일촉 즉발 상황도 빚어졌다.

‘대구 전쟁’과 최근 남북한이 서해에서 벌인 ‘꽃게 전쟁’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일단, 경제적·국제법적 측면에서 볼 때 황금 어장을 둘러싼 영해 다툼이 있었다. 물리적 대응 방식에서도 ‘박치기 싸움’이 벌어지고 총격이 벌어지는 등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수십 년 전쟁을 치르면서도 런던·파리·레이캬비크를 오가며 끈질기게 협상했다. 영국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선전 포고도 없었고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세 차례 대구 전쟁에서 아이슬란드는 모든 것을 얻었고 영국은 3전 3패했다.

반면 최근 1주일간 서해에서 벌어진 꽃게 전쟁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남북한이 서로 대화하고 협상할 외교 통로가 꽉 막혔으며, 중재에 나설 제3자도 마땅치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특수 상황에서 기인한다.

우선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온 의도가 단순히 경제적인 데 있다고 볼 수 없는 점이다. 그들은 북한에 비타협적 정책으로 일관한 김영삼 정부와 달리, 김대중 정부가 햇볕 정책을 펼쳐 ‘싸움’이 의외로 복잡해지자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욱 매달리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꽃게잡이 어선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북방한계선을 연일 넘어와 긴장을 고조시킨 행위는, 이 지역을 분쟁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남북 관계를 헝클어뜨리고 미·북한 간의 협상에서 유리한 카드를 쥐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패전’한 북한이 뜻밖의 ‘참을성’ 보인 속셈

일시적이나마 심각한 교전이 발생해 큰 피해를 보고도 북한이 종전과 달리 ‘참을성’을 보여준 수수께끼의 해답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지난 21일 북한은 약속한 비료가 도착하지 않았다며 남북한 차관급 회담을 팽개쳤다. 서해 사태도 트집 중의 하나였다.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 상대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뜻에서 우리가 북한의 ‘도발’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새삼 고개를 든다. 한 예로, 설사 우리 군 당국이 사태 초기에 수세적인 모습을 보였다 해도,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 보인 반응은 신중하지 못했다. 북방한계선 문제는 국제법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른 만큼 논쟁적 사안으로 미루더라도, “왜 총을 쏘아 막지 않았느냐”라는 어느 정치인의 발언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 말이 나온 바로 이튿날 공교롭게도 교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당시 어느 한쪽이 작심을 하고 총을 쏘았다면 사태가 그나마 이쯤에서 진정되었을까?

남북 관계는 서해 사태 이후 가뜩이나 더딘 길을 더 돌아가게 되었다. 햇볕 정책을 악용하려는 북한의 속셈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정과 힘의 대결보다는 이성과 대화로 ‘승리’를 이끄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굳이 대구 전쟁과 꽃게 전쟁을 비교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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