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비디오 테이프, 하이에나 언론
  • 이성욱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9.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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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테이프에 나오는 여성의 이름까지 버젓이 밝히는 한국 언론의 악마성. 개인의 프라이버시 정도는 한 칼에 날려 버리는 파시즘적 폭력이 언론과 우리의 깊숙한 곳에 또아리 틀고 있다는 것이 무섭다.”
목하 대한민국 국민은 노·장·청 할 것 없이 모두 중학생 아니면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한국의 언론은 전국민을 그쯤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은 비디오나 CD로 ‘업 그레이드’되었겠지만, 전에만 해도 학교에서 급우 가운데 누군가 여성의 나체 사진 하나만 가지고 오면 교실은 한꺼번에 그 사진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너 봤냐?’ ‘아니 아직 안봤어. 어떤데?’ 등등. 말하자면 여성 나체를 보고 싶어하는 사춘기 소년의 호기심을 뒷배로 하여 그 사진 하나가 교실 전체의 분위기와 감수성을 쥐락펴락하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형국에 놓여 있다. 신문·방송을 비롯한 ‘유수한’ 혹은 ‘하이 퀄리티’를 지향한다는 한국의 언론 매체들은 시중에 널리 나돌고 있는 이른바 ‘O양 포르노 테이프’를 미끼 삼아 전국민을 순식간에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이 포르노 테이프와 관련한 한국 언론들의 보도 방식과 태도를 보면서 언론이 드러낼 수 있는 부정적인 양상의 최대치를 확인한다.

파시즘 구도와 정확히 일치하는 언론의 횡포

파시즘은 대중 선동에 강하다. 선동에 필요한 각종 미디어를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나 세력에 의해 장악되는 경우가 아니라도, 언론들이 서로 배짱이 맞으면 그들의 ‘강철 연대’는 곧바로 파시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언론에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모든 언론이 그 사실을 매장해 버리려고 합심한다면 그 일은 어린아이 손목을 꺾는 일보다 더 간단하다. 매장되는 개인의 인권, 매장하는 언론의 권력. 이 구도는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난행을 가하는 파시즘의 구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파시스트는 비열한 하이에나 떼거리와 방불하다. 하이에나는 자기보다 약한 짐승에게만,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떼거리로 달려든다. 지금 한국 언론은 ‘정론지’ ‘민족지’ ‘스포츠 신문’ ‘국민의 방송’ 할 것 없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단지 ‘조선’ 사회에 사는 여자라는 죄 하나 때문에 반항할 기미조차 보일 수 없는 한 여성을 이리 뜯어먹고 저리 찔러 보고 있다.

그들은 오직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알 권리가 더 중요하기에 드디어 그 여성의 이름 석 자까지 국민에게 친절히 알려 주고 있는 와중이다.

나는 이 흥건한 악마성 앞에서 몸이 자꾸 오그라든다. 무섭다. 힘 있는 자, 저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적당한 타협을 궁글리면서, 힘 없는 자들에게는 가차없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그 비열한 악마성이 무서운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이미 광범하게 퍼져 있는 소문이고 또 그 비디오 테이프를 실제 본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런 문제적 소재를 언론이 다루는 것은 책 잡힐 일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일반론을 두고 한가로운 논쟁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작해 보아야 할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그 개인이 철저히 파괴되는 일이 번연히 일어나는 현상과, 그런 현상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할 언론이 오히려 그것을 증폭·확장시키는 데에 팔 걷어부치고 나서는, 이 어이없는 일이 우리 속의 파시즘이나 다름없다는 점이다.이번 에피소드는 물론 이른바 ‘사이버 스페이스’가 드러내는 역기능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이버 테러’는 그 결과가 현실 층위에서는 아주 끔찍한 일로 귀결된다 해도 그 과정이 마치 전자 게임과 같은 비현실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이 문제를 우리는 이미 걸프전쟁에서 보았다), 또 테러리스트가 스스로를 테러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사이버 테러, 관음증에 사로잡힌 사회, 섹슈얼리티의 뒤틀린 방출 같은 주제로 이번 에피소드에 접근하는 일이 차라리 사치로 여겨진다. 이른바 개인의 프라이버시 정도는 한 칼에 날려 버릴 수 있는 파시즘적 폭력이 언론 그리고 나와 당신의 깊은 곳에 여전히 또아리 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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