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군자 나라의 ‘뻔뻔한 강간’
  • 진중권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9.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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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내들이 O양의 사생활을 침해했다. 이건 인권 유린이며, 범죄이다. 비디오를 내다 판 녀석, 그걸 돈 주고 사 본 놈, 친구에게 빌려준 놈, 빌린 놈, 인터넷에 띄운 놈, 모두 범죄자들이다.”
텔레비전을 본다. ‘컴맹 탈출’이라 해서 어느 유명한 탤런트가 진행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그랬던지 진행자가 농담을 한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이후 시청자 여러분께서 전화를 걸어옵니다. 어떤 분은 인터넷에 ‘O양 비디오’가 떴다는데 거기에 접속하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순간 좌중은 웃음바다를 이룬다. 남자들도 웃고 여자들도 더불어 낄낄거린다. 오, 하느님. 대한민국 남자들이야 전세계적으로 ‘싸가지 없기가 동메달감’이라서 그런다고 하자. 하지만 저 순간에 입 벌리고 따라 웃는 저 여성 진행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O양이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신문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법 복제된 그 비디오를 보았다. 심지어 방송계의 일부 도덕군자들이 O양의 출연을 금지해야 하네 마네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대체 왜들 이럴까?

포르노 비디오를 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거 금지하니까 전세계에서 속옷이 제일 깨끗하다는 이 해동의 도덕군자 나라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영예를 누리는 거다.

포르노 합법화해야 ‘불쌍놈’ 준다

왜들 이렇게 밝힐까? 그게 다 굶주려서 그런 거다. 그러므로 이런 얄팍한 이중성을 극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포르노를 합법화하는 것이다. 나아가 여기 독일에서처럼 주말 저녁마다 텔레비전으로 마구 펑펑 때리는 거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사랑, 무도회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신데렐라와 왕자의 사랑, 마굿간에서 꽃피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목동의 사랑…. 우리도 고전을 각색하면 뭐 좀 나오지 않을까?

처음에는 아마 침들 흘리며 볼 게다. 실은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한 1년쯤 보라. 보고 또 보라. 그러면 아마 리모컨을 쿡쿡 누르다 우연히 포르노 장면이 걸려들면 ‘으악’ 비명을 지르며 채널을 돌리게 될 게다. 성은 음식하고 비슷한 거다. 말하자면 굶주린 사람에게 궁중 요리와 1달러 짜리 맥도널드 햄버거의 차이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차이를 알려면 일단 배가 불러야 한다. 그래야 ‘헉, 헉, 헉’ 포르노 밝히는 그 허겁지겁이 점잖은 에로틱 취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 길을 콱 막아 놓으니까 양반의 나라에서 기껏 비겁하게 남의 사생활이나 엿보며 킬킬거리는 천하의 불쌍놈이 넘쳐나는 거다.

최고의 에로틱은 수동적 관객이 아닌 능동적인 성적 주체가 되어 직접 연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보기에 O양은 그 어느 ‘골 빈’ 철학자보다 인생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 촌스러워서 그의 작품을 평가할 존재 미학적 코드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에 수백년 묵어 악취가 풀풀 나는 고약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법. 그리고 그 놈의 도덕이란 것은 원래 무식한 주제에 힘만 막강해서 멀쩡한 사람을 잡는 데에서 제 존재 의의를 찾는 법이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O양은 그 비디오가 밖으로 유출되어 공개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사에 관계없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인의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민주 사회의 시민이라면 소극적으로는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해서는 안될 법적 의무를 진다.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타인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을 볼 경우 그것을 적극적으로 말려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진다. 나는 ‘도덕’이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이 도덕 군자의 나라에 사는 수많은 사내가 한 개인의 사생활을 사정없이 강간했다. 그러고도 잘했다고 지금도 킬킬거리고 웃는다. 이건 범죄다. 심각한 인권 유린, 인권 침해다. 비디오를 내다 판 그 녀석만 범죄자가 아니다. 그걸 복제해 판 그 자만이 범죄자가 아니다. 그걸 돈 주고 사 본 놈, 친구에게 빌려준 놈, 빌린 놈, 나아가 인터넷에 띄운 놈, 모두 천하의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다.

듣자 하니 O양은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미국으로 도피했다고 한다. 도대체 수치를 느껴야 할 자들이 누구인가? 정작 얼굴을 붉혀야 할 그 자들은 오늘도 뻔뻔하게 조국의 하늘 아래 건재하고…. 대체 왜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거꾸로 흘러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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