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고 싶은 <타는 목마름으로>
  • 이재현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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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때의 열정이나 헌신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점이다.”
가수 안치환이 새 음반 <노스탤지어>를 냈다고 한다. 실린 노래는 <새> <타는 목마름으로> <친구에게> 등 80년대에 대학가에서 널리 불리던, 이른바 민중 가요라고 한다.

아직 노래를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녹음 도중 몇 번씩이나 울컥했다는 안치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요즘 들어 부쩍 노스탤지어에 빠지는 일이 많다. ‘개판’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80년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과 언론 들은 요즘 한국 경제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물론, 한국 경제가 경기 순환상의 불황만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포인트는 아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 시스템의 기본 원칙이 무너져 버렸으며, 또 그 사실이 이제 명백히 만천하에 드러난 데에 있다. 그래서 이제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정치인과 정치판에 대한 원초적 불신이다. ‘그 놈이 그 놈’인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현대사에서 사회 시스템의 기본 원칙이라는 것이 제대로 있어 본 적은 없다. 광복 이래 늘 그러했다. 계엄군과 정치 깡패와 고문 기술자를 내세워 통치한 것은 이승만이나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마찬가지였다. 노태우를 거쳐서 이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진 바 없다. 대권을 손에 쥔 한두 사람의 마음대로 나라가 굴러왔던 것이다 .

김영삼 정권의 실패는 우리 자신의 실패

여기서 문제의 원인을 거산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퍼스낼리티에서만 찾는다든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방자한 ‘소산’의 국정 개입에서만 찾는다든가 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묻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제대로 된 정치 제도와 정치 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한 책임을 져야 한다. 김영삼 정권의 실패는 우리 자신의 실패이다.

최근 경실련의 도덕성이 크게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어느 일간지에서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고 요약하면서, 그 원인을 짚어냈다. 그런데, 도시에 산다고 해서,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저절로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국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시민과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임은 세금을 제때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는 원리를 세우기 위해 자신이 정치적 담보를 제공해야 한다.

90년대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이어야 할까. 자유·평등·정의·복지·분배?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고 나서 욕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작은 개혁이라고 하더라도 나 자신이 그것을 절실히 원하고 내 몸과 마음을 바쳐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 탓이오’라며 제 가슴을 두드리자는 얘기는 아니다. 개인적·도덕적 환원주의에 빠져 문제를 호도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내 말은 각자가 정직하게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사회 제도를 밑바닥에서부터 뜯어고치려는 대장정에 뛰어들 것인지를.

80년대에 우리들 중 일부는 혁명이냐 개량이냐를 물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우습게 보았던 개량조차도 안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급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급진적이라는 것은 말과 행동이 거칠다는 것이 아니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뿌리로부터 사고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제도이든, 그리고 그 제도 안에서 권력을 쥔 어떤 개인들이든 보수적으로 자신을 보존하려는 성향을 갖는 것은 본성이다. 따라서 사회 제도를 그 밑바탕과 뿌리에서부터 뜯어고치려면, 그리고 사회의 근본 원칙을 새롭게 합의하고 세워나가려면, 무엇보다, 사회 전체가 이렇게 ‘개판’이 되어온 역사적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본 집단이나 개인이 누구인가를 먼저 정확히 가려 준엄히 심판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사회 제도 전체를 다시 뜯어고칠 수가 있다. 경제를 살린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국민 화합이니 산업 평화니 하는 미명 아래 역사와 현실을 호도하는 섣부른 구호들이 이제까지 나라를 망쳐 왔다.

물론, 이제 ‘타는 목마름으로’를 외쳐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안치환의 음반을 들으며 ‘oldies but goodies’라고 위안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분명 우스운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문제는, 그때의 열정이나 헌신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점이다. 80년대의 가장 귀중한 ‘문화 유산’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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