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불신의 스모그 걷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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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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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우리 사회를 질식시킨 권력형 부정 부패의 표본인 한보 게이트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응징, 김현철씨 사조직의 이권 개입에 대한 전모를 공개해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이른바 ‘대국민 사과문’을 보면서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의 신분이 4천만 국민을 향하여 심심한 사과의 뜻을 표할 만큼 비중 있는 공인의 자리가 아닌 바에야 그의 사과는 어디까지나 사인(私人)으로서 개인의 잘못을 사죄하는 범주를 넘을 수 없다. ‘아버님을 도와 드리려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허물이 되어 도리어 아버님께 누를 끼치고’ ‘못난 자식을 둔 아버님께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허물을 사죄’한다는 그의 언설은, 집안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빌 불효자의 읍소로는 절절할지 모르지만,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내용일 수는 없다. 더구나 국회 청문회 증인이나 검찰 재조사에 응하는 문제는 그가 결단할 사안이 아니라 입법부의 국정조사권과 검찰의 수사권에 따라 결정되는 엄정한 국정 기능의 메커니즘이다.

이보다 더 당혹스러움은 그가 사죄하며 용서를 비는 잘못의 실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사죄나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허물의 내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다음에 이루어질 절차이지, 완강한 의혹의 미궁과 맞닥뜨린 시점에서 주고 받을 카드는 아니다. 더구나 일찍이 한보 관련 의혹을 제기한 야당 의원들을 명예훼손 죄로 고소한 바 있으며, 각종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결백을 누누이 주장해온 그가 아닌가.

공인도 아닌 한 젊은이의 분별 없는 사과는 지금 국민이 처한 불신과 의혹의 심리적 공황 상태를 치유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권력형 부정 부패의 표본인 한보 게이트에 대한 철저한 사실 규명과 응징, 김현철씨 사조직의 국정 농단과 이권 개입에 대한 전모를 공개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는 불신의 스모그를 걷어내야만 한다. 이 고통스러운 작업은 머지 않아 열릴 국회 청문회와 검찰 재수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수사권이 없는 국회 청문회보다는 검찰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의혹의 실체에 접근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검찰은 지금 현철씨와 관련해 한보 연루는 물론 각종 이권 개입, 고위직 인사 압력 등에 대해 내사하면서 법률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마피아의 잣대’라고 통박당한 검찰이 대오 각성하여 실추한 명예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재수사에 임하는 검찰이 이번 기회를 환골 탈태의 전기로 삼기를 기대한다. 전두환·노태우 씨 등 80년의 신군부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면죄부를 주었던 2년 전의 검찰과, 한보 사태 및 김현철씨에 대한 축소 수사 의혹을 받는 지금의 검찰 사이에 어떠한 자기 개혁적 성숙이 있었는지 뼈저린 자문을 해야 할 것이다.

검찰의 주인은 정부·여당이 아니라 국민

김씨 재수사에서 정권 비리, 권력형 비리에 맥을 못추던 구태를 재연한다면, 또다시 여론의 호된 질책과 함께 검찰 무용론이라는 오욕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비리가 크면 클수록 아무리 검찰이 축소·은폐하려고 해도 결정적 증거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명명백백하게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전·노 재수사를 촉발한 박계동 전 의원의 비자금 계좌 폭로와, 김현철씨의 YTN 인사 개입을 입증한 녹음 테이프가 그러한 사례이다.

지금 검찰은 의혹 덩어리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낱낱의 의혹이 국가 기강과 우리 사회 건강성, 권력의 파행과 고위직 비리 등에 관련된 중요한 사안들이다. 대학원생 현철씨는 무슨 돈으로 사무실 몇 개와 사조직을 거느릴 수 있었는가, 지역 민방·유선방송·고속도로 휴게소의 업자 선정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풍설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15대 총선 신한국당 공천, 고위직 인사 개입을 통해 구축한 이른바 ‘현철 인맥’의 실상은 어떠한가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 앞에서 검찰이 어떤 수사 태도를 취할지 주목된다. 오로지 검찰이 할 일은 대통령의 아들이 권력 실세로 군림하며 국정을 왜곡했다는 의혹의 실체를 가감 없이 밝혀내는 일이다. 검찰은 자신의 주인이 정부·여당이 아니라 국민임을 각성하고 어떠한 경우든 국민에 충복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실추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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