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몰락’을 경계하자
  • 김정란 (상지대 교수·불문학) ()
  • 승인 1997.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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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인식은 삶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지, 삶을 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삶에 대한 격렬한 투사이며 혁명가이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우리 사회에 퍼져가고 있다. 여러 출판사가 꾸준히 신화 관련 서적을 내고 있으며, 대형 서점들에서도 따로 코너를 마련할 정도로 대중적 관심이 정착되어 가고 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신화와 관련한 책들은 전부터 꾸준히 출판되어 왔다. 이른바 ‘정신주의’ 또는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뉴에이지 경향의 출판물들이 그것인데, 꾸준히 소비되는 스테디 셀러 성격의 책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늘 시집 베스트 셀러 명단에 올라 있는 정신주의 시집도 있다. 가벼운 영성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영성주의(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팔기 위한 영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성향은, 긍정·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상세한 논의는 피하도록 하자. 다만 한 가지, 이러한 책들이 대체적으로 정신 또는 영혼의 실용주의적인 측면에 기울어 있다는 것만을 말해두자.

신화의 대중적 효용성 탁월

9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성향은 본격적인 출판물들에 의해 극복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신비주의의 실용주의적 관심에서 인문학적 관심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신화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일은 정신분석학 관련 서적 출판과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출판물들이 궁극적으로 답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대중이(물론 대단히 한정된 숫자이기는 하지만) 70~80년대에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정치·사회적인 열기에서 벗어나 차분히 존재 자체의 신비에 대해 묻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 같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질문에서 존재론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존재에 대한 질문이 공시적 축에서 통시적 축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때 신화는 대중에게 대단히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지성주의적 삶의 해결 방식이 실재를 지워버리고 추상적인 개념만을 건져내며 역사주의적 시간관을 택하는 반면, 신화는 삶의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소여(所與)들을 활용하고,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비시간적인 해결 방식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당장 신화의 대중적 효용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 이론을 강의할 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학생들은 신화 이야기를 하면 눈을 반짝인다. 신화가 재미있는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욕망과 좌절이, 삶을 ‘읽는’데 쓰인다는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존재가 텍스트로 활용된다는 느낌, 황당무계한 이야기인 줄 알았던 신화가 실은 인류가 누대에 걸쳐 정교하게 짜놓은 일종의 구체적 형이상학이라는 느낌.

그런데, 신화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신화소(神話素)들은 심리적 에너지가 실려 있는 상징 또는 이미지이다. 이 원형적 이미지들이 지닌 강력한 영적·종교적 의미 때문에, 그것을 접하는 영혼은(이 용어가 껄끄럽다면 ‘내적 존재’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도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저널리스트적인 시각으로 쓰인 그레이엄 핸콕의 <창세의 수호신>에서도 저자는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를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전문가적인 식견을 요구한다. 한동안 법석을 떨었던 ‘전생 신드롬’ ‘이야기 세상 속으로’에서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실화 형식의 귀신 이야기들, 여학생 기숙사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괴기담, 심심하면 한번씩 휩쓰는 ‘UFO 신드롬’ 등은 대중의 신화적 욕망을 드러내는 일화들이다.

신성한 미지의 존재들이 확보하고 있는 존재의 실재성에 대한 갈망, 떠도는 존재를 세계의 중심에 정착시키고 싶은 갈망,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대중이 그 욕망을 통해 존재의 깊이 있는 성찰에 이르도록 돕는 일이다. 이 언급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삶의 유한성, 즉 ‘시간’과 싸우는 형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신화는 대중적 욕망과 야합할 때 흔히 환상적 요소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소극적 의미의 환상이야말로 시간을 잊어버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신화적 인식은, 삶의 일회적 방향성을 세계, 또는 우주 전체 안으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지, 삶을 잊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삶에 대한 격렬한 투사이며 혁명가이다. 예수는 하늘을 얻기 위해서 몸을 찢으면서 삶의 안쪽에서 싸웠다. 대중의 다리나 긁어주는 모든 신화 사용은 환각제 복용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몰락이다. 신화적 인식은 인식의 졸음이 아니다. 진정한 꿈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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