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마이클 윈터비텀 감독<쥬드>
  • 전찬일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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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사회적 힘에 도전한 남녀의 파멸 그려…촬영·음악·세트 등 훌륭
<트레인 스포팅>과 더불어 96년 영국이 낳은 또 하나의 화제작. <테스>의 작가 토마스 하디의 <비운의 쥬드>를 영화화했다. 파격적으로 각색했으면서도 원작의 고풍스런 대사를 사용한 <로미오와 줄리엣>과 <리처드 3세>가 아니라, 체인 오스틴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으려 애썼던 <센스 센서빌리티>에 가깝다. 그만큼 원작에 충실하다.

영화 역시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국 빅토리아 왕조 말기인 1880년대를 주된 시간적 배경으로 메리그린·크리스민스터·멜체스터·세스톤·알크브리컴과 그밖의 다른 곳. 다시 찾은 크리스민스터 순으로 진행된다.

가난한 시골 출신 고아 쥬드(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는 하층민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마을을 떠나는 필로스턴(리엄 커닝햄) 선생의 단 한마디에 꿈을 다진다.

계급의 장벽으로 인해 결국은 깨지고, 막 꿈을 품을 때부터 이미 비극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건만, 쥬드는 그 위에 개인의 본능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는 실수까지 보탠다.

양돈업자의 딸 아라벨라(레이첼 그리피스)와 얼떨결에 결혼했다가 이혼하지 않은 채 헤어진 상태에서 사촌 수(케이트 윈슬렛)와 금기의 사랑을 하고, 게다가 홧김에 필로스턴과 결혼한 수와 마침내는 동거해 아이들까지 낳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다분히 충격적인데, 출신 성분과 사회 규범, 종교의 가르침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고의 덕목이던 당시로서는 시대를 거스르는 대일탈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비극이 아니라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쥬드>는 석공이면서도 라틴어 책을 읽고 자유자재로 라틴어를 구사할 정도로 지적이며 당당한 쥬드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는가를 추적하면서, 어떤 힘들이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원작처럼 영화도 사회적 힘보다는 개인적 요인에 더 집중한다. 당시 사회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인간 행동의 본질과 내면적 갈등에 치중하는 것이다. 사회적 요인을 더 부각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오겠지만, 금지된 사랑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비극성이 극대화한 것은 사실이다.

주변 캐릭터를 지나치게 생략한 탓에 극적 설득력이 약하고 밀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외국의 평자들도 있지만, 내게는 트집잡기로 보인다.

이 작품은 촬영·음악·세트·연출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한 것이 없다. 좋은 영화가 지녀야 할 미덕들도 충분하다. 운명과 사회적 힘에 도전한 개인의 파멸이라든지, 그러면서도 그에 저항하는 불굴의 의지의 소중함 같은 주제도 넉넉히 느껴진다.

등장 인물들, 현대 영화의 캐릭터만큼 ‘생생’

게다가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인물 해석과 연기 연출의 현대성이다. 시대적 배경이나 꼼꼼한 공간 연출·의상·스케일 등을 볼 때 <쥬드>는 분명 시대극의 속성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인물들, 특히 수와 쥬드는 현대 영화의 캐릭터를 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백여 년 전의 지나간 캐릭터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까지 그 활력이 전이된다고나 할까. 부조화스러울 법한데 흥미롭게도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것은 현대물의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하는 연기 방식에 의해 가능하다.

비극적인, 너무나도 비극적인 캐릭터를 구현하는 윈슬렛과 에클레스턴은 자신들의 배역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연기한다. 과장을 일절 배제하고, 시대를 훨씬 앞선 듯이 행동하고 말한다. 특히 윈슬렛의 모습은 <줄과 쥠>에서의 잔 모로를 많이 닮았다. 감독은 몇몇 장면에서 그 영화를 인용하기도 한다. 속도감 있는 편집 또한 영화의 현대성에 일조한다.

비장미를 전해야 할 캐릭터와 연기에서 비극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천만의 말씀. 그들은 스스로의 비극을 떠벌이지 않는다. 그런데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이다. 거기서 연유하는 역설적 비극성이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시대성과 현대성의 절묘한 조화, <쥬드>의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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