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판도라의 상자’ 다시 열어라
  • 김민웅 (재미 칼럼니스트·목사) ()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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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석영도 석방시키지 못하는 ‘문학의 해’를 보면서 판도라 상자의 비극을 떠올린다. 문학은 믿음을 상실한 시대에 판도라의 상자에 감금된‘희망’을 해방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학에서 성(性)은 ‘판도라의 상자’인가. 함부로 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다가 작가에 대한 사법 조처까지 논의되는 상황에 이른 한국 문단의 성담론 문화는, 이 시대 어떤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지금 한쪽 진영의 주제는 ‘자유’로 집중되고 있다. 영화 검열을 비롯해서 문학 작품에 대한 사법 조처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응하는 모든 저항은 ‘자유의 영토’를 건드리지 말라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반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깃발은 ‘한 사회의 정신적 순결’이다.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포르노에 대한 규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유가 순결을 범하고 순결이 자유를 봉쇄하는 모순의 현실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지나갈 뻔했던 96년 말미에 ‘문학의 해’ 의 체면을 간신히 세워 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어떤 이유로도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이에 대한 한국 문학의 90년대, 아니 세기말적 문제 제기가 기껏 성담론의 자유를 계기로 삼고 있다는 국제적 초라함과 거기서 오는 ‘깊은 슬픔’이다.

문학은 권력의 횡포 향해 쏘는 화살

성기와 성교에 대한 표현의 한계를 법으로 정하겠다는 것은, 창조의 영역인 문학의 향취를 건조한 법조문의 손길로 다듬겠다고 나서는 것과 다름없다. 사실에 토대를 둔 법관의 판결이 궁극적으로 그의 양심에 의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사실과는 다른 문학적 상상력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고유한 지적 재산이고, 그것을 어떻게 행사하는가도 전적으로 작가의 양심과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또한 이를 문학적 양식(糧食)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중의 자율적 문화 투쟁’에 맡길 일이다. 법이 독서 대중을, 유해한 문화 환경으로부터 격리해야 할 미성년으로 취급하는 자세는 착각 내지 오만일 따름이다.

한국 사회의 도덕적 관점은 법으로 강제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대중이 무엇을 이 사회의 가장 큰 상처들로 여기고 있는가에 좌우된다. 그런 의미에서 유독 정치·사회적 권력 구조를 거세한 ‘성담론의 자유’가 초점이 되어 문학적 상상력의 고유 영역으로 부각되는 것이, 다른 자유에 대한 관심을 소멸시켜 나가려는 ‘문화 정책상의 정치적 저의’에 휘말리는 결과가 아닌지 날카롭게 경계할 일이다.

만일 문학이 성을 소재로 삼으려 한다면, 그건 ‘무한히 일그러진 성’에 탐닉하면서 일체의 다른 돌파구를 외면하도록 조장하는 한국 사회의 권력을 향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화살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말초적 감성을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조련하는 권력과 자본의 지배 논리에 자기도 모르게 봉사할 뿐이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슴 벅찬 꿈과 목표와 이상을 주기는커녕 그것을 좌절케 하는 권력과 그 권력이 운영해 가는 사회의 내면을 고발하지 못하고, 이 권력의 일상적 형태와 부단히 싸우면서 새롭게 성숙해 가는 인간형을 보여 주지 못하는 ‘문학의 자유’는 정신적 자위 행위가 도달하는 패배주의의 자폐적 변형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은 무슨 이름을 붙여도 병적 변태에 몰두하는 노예 문학이다.

트리니다드 출신인 흑인 문명 비평가 C.L.R. 제임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동요하고 있던 30년대의 미국 문화 현상을 분석하면서, 사립 탐정 딕 트레이시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릿 미첼, 그리고 찰리 채플린 등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요소를 이렇게 정리한다. ‘이들은 모두 공식적인 사회의 경계선을 돌파한 자유인들이었다. 특히 찰리 채플린을 보라. 그는 힘이 약해 우스꽝스럽게 넘어지지만, 곧 유유히 옷을 털며 지팡이를 짚고 그 유명한 더비 중절모를 고쳐 쓰면서 또다시 도전의 하루를 위해 일어난다.’ 문학과 대중 예술이 일상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에게 준 용기의 원형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

작가 황석영의 석방조차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는 ‘문학의 해’를 보면서, 판도라 상자의 비극을 떠올린다. 멋모르고 열었다가 혼이 난 판도라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 소리치는 것을 끝내 묵살하고 상자를 영원히 봉해 버린다. 판도라는 먼저 겪은 상처와 불신 탓에 희망마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문학은 바로 이렇게 인간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린 이 시대에 판도라의 상자에 감금된 내일의 희망을 해방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유에 대한 부르짖음도 그런 것이 되지 않으면, 이 시대의 정신적 절망은 너무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가령, 법정 소설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스콧 터로와 존 그레셤이 왜 없는지 이 기회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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