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만 유연하면 뭐하나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3.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직된 참모들, ‘무조건 오프’ 걸어 대통령 뜻 국민에게 전달 안돼
노무현 대통령이 2월26일 국민일보 남 아무개 기자에게 e메일을 보냈다. 그 전날 남기자가 쓴 ‘달라진 청와대 풍속도’라는 기사를 읽고 난 소감을 담아서다. 이 기사에는 탈권위를 지향하는 노대통령의 행보와 특권이 사라진 청와대의 모습이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노대통령은 ‘남기자가 지적한 대로 청와대가 엄청 달라진 것이 사실이며, 이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이어 ‘나는 초선 의원 시절부터 (스웨덴) 팔메 총리를 이야기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그려 왔고, 지금도 (캐나다) 트뤼도 총리를 매력 있는 지도자로 생각한다. 요즘은 (미국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을 보면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리더십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대통령이 이처럼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지난 1년간 그가 가장 역점을 두어 온 탈권위주의 행보의 긍정적 측면이 이 기사에 잘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취임 후 ‘정치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했고, 실제로 그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잦은 말 실수’ 같은 다른 뉴스들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마당에 자랑하고픈 대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사가 나오니 노대통령 처지에서는 어떻게든 공감을 표시하고 싶었을 법하다. 게다가 대통령이 기자 개인에게 e메일을 보내는 일 자체가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점도 놓치지 않았음직하다.
하지만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은 바로 전날 노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취임 1주년 기념 오찬 간담회에서 이미 했던 것이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오찬 간담회에는 2백명 가까운 청와대 출입기자가 참석했는데, 기자는 시사지 대표로 헤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사진). 식사가 시작되자 노대통령은 <웨스트 윙>을 즐겨 보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노대통령은 “대통령과 비서, 취재진 간의 만남이 자유롭고 생동감 있다. 가끔 음모도 나오지만, 권력 핵심부의 선의(善意)와 프로 정신, 재능이 잘 배합되어 있어 따뜻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예의 팔메, 트뤼도 총리 얘기도 꺼냈다. 그러면서 제도와 격식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한국의 경직된 정치 문화를 바꾸기 위해 애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런 노대통령의 생각은 아예 기사화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청와대가 헤드 테이블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포괄적 오프(off)’를 걸어 다른 테이블의 기자들과 공유만 할 뿐 보도는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오프’는 이번의 경우처럼 정작 대통령의 생각을 외부에 알리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대통령의 유연성과 홍보 욕구를 오히려 참모들이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인상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