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갈 담그듯 사랑하라
  • 황종연(문학 평론가·동국대 교수) ()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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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의 맛은 짭짤하고 곰삭은 것이다. 사랑의 기쁨 또한 남녀 사이가 시간 속에 삭아가고 깊어가며 생기는 것이다. 사랑은 남녀가 인생 속에서 맺는 모든 관계의 경험을 ‘저장’함으로써 완성된다.”
한국인의 밥맛을 돋우는 전통 식품 중 하나인 젓갈은 김치 못지 않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신문왕이 왕비를 맞으며 쌀·술·기름·꿀·장·메주·포와 함께 젓갈을 폐백으로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젓갈은 고려와 조선 왕족의 식탁에도 빠지지 않았던 모양으로, <만기요람> 등의 문헌에 적힌 진상품 목록에는 새우젓·알젓·게장 등이 들어 있다. <증보 산림경제>에는 청어젓·대합젓·생굴젓·새우젓·자하젓·게장 등을 담그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어서, 젓갈 담그기가 주요 식품 생산 기술 중 하나로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그 명칭이 존재하는 젓갈류는 100 가지가 넘는다.

보존과 인내가 미덕인 ‘젓갈 문화’

자연과 인공의 이분법에 따라 식품을 구별하자면 젓갈은 생산 방식에서 자연에 가깝다. 젓갈 담그기의 핵심은 재료를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장하는 것이다. 젓갈은 불과 같은 수단으로 재료의 본성을 변형한 결과가 아니라 재료의 본성에 알맞게 보존한 결과이다. 젓갈 담그기의 기본인 소금 절임은 부패라는 자연적 과정을 기다리고 조절해서 식품을 얻는 공정에 해당한다. 젓갈은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탈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선사받은 것이다. 젓갈의 문화를 말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저장의 문화, 보존과 인내를 미덕으로 삼는 문화이다.

전래 민요 중에 흥미롭게도 젓갈을 노래한 것이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불렸다는 <기나리>가 그것이다(기나리는 개(浦)나리(百合)의 사투리인 듯하나 어떤 사물의 명칭인지 가사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가사는 이렇다. ‘조개는 잡아서 젓 절이고 가는 님 잡아서 정 들이자. 어저께 왔소 그저께 왔소 열에 두석 달 잘 있다 왔소. 고대광실만 바라지 말고 초가삼간이라도 정만 깊어라. 여울의 차돌은 부대껴 희고 이내 몸 달뜬 건 그 누구 알까. 갈밭에 뜬 달은 기러기가 알지요 이내 속 달 뜬 건 그 누가 알까.’

아마도 갯마을의 아낙네들이 조개잡이를 하며 불렀을 이 민요는 부귀영화를 좇아 집 밖으로 나도는 남자 때문에 사랑의 충족을 얻지 못한 여자의 애타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조개는 잡아서 젓 절이고 가는 님 잡아서 정들이자’는 대구를 맞춘 구절이다. 젓 절이기와 정 들이기의 유추가 인상적이다. 젓갈 담그기와의 유추 덕택에 남녀 간의 사랑은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얻는다. 젓갈을 얻으려면 조개를 독에 가두어야 하듯이 사랑을 하려면 남자를 집에 잡아두어야 하고, 젓갈이 맛이 나려면 기다려야 하듯이 사랑이 익으려면 참고 견뎌야 한다.

더욱이 젓갈의 맛은 상쾌하고 달콤한 것이 아니라 짭짤하고 곰삭은 것이다. 사랑의 기쁨 또한 남녀 사이가 시간 속에 삭아가고 깊어가며 생기는 것이다. 오래 전 북한 지역에서 불렸던 민요 <기나리>에서 남녀의 정은 싱그러운 연정도 아니고 불꽃 같은 열정도 아니다. 만남과 이별, 화합과 갈등, 애착과 증오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성취되는 사랑이다. 그것은 남녀가 인생 속에서 맺는 모든 관계의 경험을 ‘저장’함으로써 완성된다.

현대 한국의 남녀 모두 옛날 조상들이 먹던 젓갈류를 먹지만 조상들과는 아무래도 다른 인간이다. 현대 한국인의 사랑은 <기나리>에 표현된 사랑과 판이하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하루 평균 4백쌍 가까이 이혼해서, 결혼하는 쌍의 절반 정도가 이혼하는 셈이며, 한국인의 이혼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제2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수많은 부부와 연인의 식탁에는 오늘도 젓갈이 오를 것이다. 그러나 젓갈의 묘미를 낳은 사랑의 도덕이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지 궁금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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