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의 눈물, 박근혜의 미소
  • 이재현(문학 평론가) ()
  • 승인 2004.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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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문화적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따라서 정당은 정책과 이미지를 탁월하게 통일해 내야 한다. 재미있고 즐거우면서도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흐름을 놓치면 안된다.”
내가 보기에 이번 선거에서 두드러진 점의 하나는 정치에서의 문화적 영향력이 더 커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최연소 지역구 당선자 김희정씨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당선 소감을 말하면서 ‘망가진 얼굴’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아주 심한 배신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김희정씨는 사전에 공식 배포된 사진 이미지에서 텔레비전 앵커 수준의 빼어난 외모와 패션 감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각한 어조로 이러한 경향을 비판한다. 이미지 정치는 실체나 본질을 가리거나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 정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일종의 문화적 문맹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판을 좌우하는 문화적인 것의 위력은 이미 탄핵 무효를 외치던 촛불 집회에서 드러났다. 같은 불이지만, 화염병에서 촛불로 전환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굳이 바슐라르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타오르는 불이라는 것은 우리를 긴장 속에서도 항상 생동하게 만든다. 불의 역동성, 변화무쌍함과 상승 의지 그리고 이윽고 꺼져갈 때의 허망함과 아쉬움은 그 자체로 우리 삶에 대한 기막힌 은유로 작동하는 것이다. 본디 우리 삶이 불을 닮아 그러할 뿐더러, 불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디 그러한 모습을 순간적으로 깊이 통찰하게 만들어 주며, 더 나아가 정서적으로 더욱 몰입하게 해준다.

일상 생활에서 촛불은 전깃불이나 장작불과 달리 매우 사적이고 내면적인 미디어다. 보통 우리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을 때, 혹은 어떤 생각이나 정서에 깊이 침잠하고 싶을 때 촛불을 켠다. 그런데, 촛불 집회라는 것은 각자의 이 사적이고 내면적인 정황들이 수십만 개씩이나 시내 한복판에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림에 비유하자면 촛불 집회 참가자들은 각자 모두가 렘브란트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어 밤의 광장에 모이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이념적으로 전혀 다른 노회찬과 전여옥에게 동시에 열광할 수 있는 세대가 출현한 것은 문화적인 시각이 아니라면 제대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이 세대에게 정치는 이제 심각한 것만은 아니다.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 정치에 몰입하는 것이다. 정치를 즐기는 것이다. 열광하되, 정치적인 적에 대해서 적개심이나 분노보다는 야유나 조롱을 택하거나, 혹은 적개심과 분노를 곧바로 야유나 조롱으로 바꾸어버린다. 그 편이 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정치 얼짱’ 되어야 한다

출구조사 발표 직후 보여준 정동영의 눈물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정동영은 출신 성분상 이미지 정치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미지 정치의 진성 당원은 못 된다. 그 눈물은 노무현의 아류에 불과하다. 노회찬의 기발하면서도 푸근한 유머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근엄할 뿐인 정동영의 한계다. 잘못했다고 빌어대되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박근혜를 따라 가려면 한참 멀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수구 언론은 진보 정당의 정치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방심과 낙마의 장면을 ‘직찍사’나 ‘돌발 영상’으로 퍼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수구 언론은 언제나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자는 거’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실체로서의 정책에만 몰두하련다는 식의 일면적 사고 방식이다. 정책으로 승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고 정책과 이미지를 탁월하게 통일해 내야 한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정치판의 ‘촛불 얼짱’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배짱과 끼와 여유와 유머가 넘치는 정치 얼짱 말이다. 재미있고 즐거우면서도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흐름을 놓치면 안된다. 우리는 바로 그 문화적 흐름의 ‘폐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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