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X파일, 대한민국
  • 백지숙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7.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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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는 불안과 충동 또는 분노가 충만해 있고, 그 뒤에서는 거대 권력 또는 신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으며, 날마다 불가해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요즘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는 한보 청문회는 일종의 ‘장르적 상상력’을 무한 자극한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비극이자 코믹이고 호러이면서 멜로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들로 하자면 하드고어(hard gore)이자 소프트코어(soft core)이고 컬트이자 키치이다. 그 영화 속의 무성한 말들, 곧 소문과 억측과 거짓말과‘사기발’은 마치 외계에서 온 생물체의 점액질 덩어리처럼 빠른 속도로 자기 증식해 가며 우리를 ‘빨아 먹으려’하고 있다.

이 영화를 괴이하게 만드는데는 주인공의 패션도 한몫 하고 있다. 양복에다 하얀 머플러를 두른 다음 마스크와 운동화를 착용하는, 이 ‘튀는’ 복장은, 한 의원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추궁하게 만든다. ‘검찰에서 다 불지 모르니 튀어라’라는 신호가 아니었냐고. 또 다른 의원은 마스크를 쓴 이유에 대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입을 자물통처럼 닫으라고 조언 받았느냐’고 물으며, 실제로 큰 자물통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깃털’로 분한 엑스트라 역시 패션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홍인길·권노갑 의원은 선거구민에 대한 예의로 수의(囚衣)대신 양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패션이 배우의 개성이나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스타일의 한 요소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여기서 패션은 신호 또는 보호막으로 기능할 뿐이다. 특히 이 패션의 신호 체계는 뭔가 범죄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 지난주 최초로 적발된 경륜 부정의 몸짓 신호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고개를 들거나 좌우로 돌리는 몸동작을 통해 우승 예상 선수를 지목해 주었다는 이 신호 체계로 ‘고작해야’천여 만원의 배당금을 챙겼다니, 한보 부정에 비할 바가 아니긴 해도 말이다. 몇조원을 주물렀던 정태수가 자기 직원을 거침없이 머슴이라고 부르고, 사업의 90%를 점술에 의존했다고 고백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곧바로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죄질’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는다. 여기서 정태수의 복장은 또 다른 ‘붕괴’를 알리는 빨간색 경고 신호이다.

또한 말할 것도 없이 그 천민성은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것은 심지어 저 높은 곳의 종교에도 여지없이 침투한다. 이미 그 신호는 ‘아가동산’에서 감지되었다. 아직 공판이 진행 중이지만, 작년 12월의 검찰 수사에 따르면, 김기순 교주는 협동농장과 신나라 유통 등을 운영하며 신자들을 ‘착취해서’ 천억원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 역시 비밀 장부를 관리해 왔으며, 7억 원을 집에 숨겨놓았고, 지방자치단체의 특혜설과 정치인·공무원과의 유착설도 분분했다. 그런 그가 종교 의식에서 입었던 옷과 갖가지 소도구들은 말 그대로 유치 찬란하다. 빤짝이가 달린 은색 드레스며 인조 보석이 박힌 왕관과 꽃가마 들을 조합해 보면 곧 상상이 된다. 늙수그레한 교주가 이런 패션으로 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불렀고, 팬티가 살짝 드러난 아가 그림이 그려진 엠블럼기를 흔들었다고 하니, 과연 한국적 ‘짬뽕’의 스펙터클이라 할 만하다.

키치 패션은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자의식적 보고서

그에 비하면 같은 사이비 교주이지만 얼마 전 집단 자살로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천국의 문’ 교주는 너무 ‘쿨’하다. 만약 김기순이 공주병에 걸린 환자라면 애플화이트는 스타트렉의 선장이다. 신도들도 천국으로 가는 긴 여행을 위해 까만색 나이키 운동화에 같은 색 바지와 셔츠를 통일해 입었으며, 먼저 떠난 사람의 얼굴 위에는 자주색 마름모꼴 수의(壽衣)를 덮어 주었다. UFO를 상륙시키기 위해 넓은 정원이 있는 주택을 선택한 이들은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자살을 결행했으며, ‘남녀의 성 구분이 없는 불멸성’을 추구하기 위해 거세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세트’개념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비록 첨단 사이버 스페이스와 종교가 결합했다 하더라도 일정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심플하고 세련된 패션이 더 이상 첨단이 아니다. 그 패션 어법으로는 우리의 복잡함·엉망진창·뒤엉킴·괴상함·어이없음을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참 ‘뜨고’있는 촌스러운 키치 패션은 단순한 복고라기보다 오히려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최초의 자의식적 보고서로 읽힌다. 촌스러움을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의 근대사, 오직 그 촌티와 때를 벗기 위해 앞으로만 달려온 역사가, 어쩔 수 없이 여전히 묶여 있는 바에 대한 자기 고백! 생각해 보면 불안과 충동 또는 공포와 분노가 충만해 있고, 그 뒤에서는 거대 권력 또는 외계인과 신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으며, 날마다 전면적으로 불가해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한국이야말로 살아 있는 X파일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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