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는 남고 박정희는 가라
  • 이재현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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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선 결과와는 반대로 우리 현실은 너무 열악하다. 이 지겹고 꼴도 보기 싫은 정치 현실에 비례하며 박정희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박정희라니!"
이번 영국 총선은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영국 보수당의 집권 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 시대와 맞먹는다. 따라서 이번 노동당의 압승은 우리에게 매우 참신한 느낌을 준다. 단편적 외신 보도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에 놀라게 된다.

우선, 새 총리 토니 블레어(44)의 이미지가 클린턴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는 젊고 비전을 갖추었으며 추진력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의 아내 세리 부스 역시 힐러리처럼 남편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는 유명 변호사이다. 세리 부스가 결혼 후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성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도 힐러리가 결혼 후 한동안 남편 성을 따르지 않았던 것과 흡사하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한 재벌은 기업 이미지 광고를 하면서 영국의 전 총리 마거릿 대처를 내세운 적이 있다. 이 광고에서 ‘구멍가게 셋째딸’ 출신인 대처는 13세 소녀 때 사진 이미지로 출연했는데, 광고 메시지는 ‘여성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정말 그 광고는 사기성이 농후한 광고였다. 여성 한 사람이 총리가 된다고 해서 여성 차별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전까지의 복지 정책을 묵사발로 만든 반동적 정치인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한국 재벌 기업의 빈곤한 상상력이 우리를 어처구니없게 했던 것이다.

한보 사태 뿌리는 5·16 쿠데타와 그 뒤를 이은 독재

반면에 프랑스의 만화가 라티에·리코르·모르슈완 세 사람이 85년에 발표한 캐리커처 만화집 <우리를 지배하는 동물들>에서 대처는 ‘암탉’으로 묘사되었다. 이 풍자 만화가 그럴듯하게 느껴진 것은 그녀의 매부리코와 닭의 부리가 닮아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굳이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국이 대처리즘 아래에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대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에만 유리했을 뿐이고 국민 전체의 복지 수준은 엄청나게 후퇴해 버렸다.

한편 이번 영국 총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동성애자를 표방한 벤 브래드쇼와 파키스탄 출신 이슬람교도 모하메드 사르와르가 모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동성애자와 제3세계 소수 인종 출신 이주민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영국의 정치 선진성을 잘 나타내는 사례이다. 이 두 사람의 의회 진출은 영국 뉴 웨이브 영화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연상시킨다.

스티븐 프리어즈는 인종 차별, 노동자의 애환, 동성애, 실업, 정치적 망명 문제를 비판적 시각으로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86년에 겨우 80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이 16㎜ 영화에서 스티븐 프리어즈는 대처 시대의 경제 번영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가 하는 점을 계급·인종·동성애 문제들과 교차시켜서 잘 묘사했다. 이 영화에는 대처리즘의 희생자인 하층 백인들이 소수 인종의 이주민 가게를 공격하는 장면이 있다. 복지 정책이 무너져 가속화한 하층민의 몰락이 대처리즘의 구호 아래에서 인종 차별로 왜곡되어 표출된 것이었다.

영국 총선 결과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현실은 너무 열악하고 지겹다. 우리 정치 현실을 대변하는 이미지는 정태수의 하얀 실크 머플러나 운동화, 혹은 그 뺀질뺀질한 얼굴 피부이다. 혹은 아버지와 닮은꼴인 김현철의 눈매나 튀어나온 아랫 입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겹고 꼴도 보기 싫은 정치 현실에 비례하며 박정희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박정희라니! 너무 한다는 생각이다. 박정희의 이미지는 내게 검은 선글라스로 남아 있다. 검은 선글라스는 박정희식 모더니즘을 상징한다. 자신의 눈은 보여주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눈이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로 구체화했다. 한보 사태의 뿌리는 92년 대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5·16 쿠데타와 그 뒤를 이은 독재 치하의 온갖 부정 부패에 있다.

박정희를 추모하는 이들은 경제 개발 성과를 내세워 정치적 독재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더구나 그러한 개발 독재의 필연적 결과가 한보 사태라는 점을 명심한다면, 애당초 그런 식의 논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거꾸로 돌아갈 바에야 박정희 시대보다 식민지 시대가 못하리라는 법도 없다. 일본의 우파 일부는 제국주의의 억압과 수탈을 그런 식으로 정당화한다. 한반도의 온갖 근대적 제도와 문물이 다 일제 식민지 통치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올해는 6월 항쟁 10주년이다. 정치 현실에 대한 혐오가 반동적 복고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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